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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없이 70년간 한반도 평화 지켜온 ‘임시 협정’ [6·25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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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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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년이 됐다. 2005년 필자가 『한국전쟁』을 출간할 때만 해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란 부제를 붙여야 할 만큼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다. 2006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이 비핵화할 경우 전쟁을 끝낼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을 때도 모두 긴가민가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1950년 6·25전쟁이 1953년 정전협정으로 멈췄지만 이것이 곧 전쟁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는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 국무장관이 참여하는 한 급 높은 정치회담 개최에 합의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정치회담은 70년 전 체결된 정전협정에 명시돼 있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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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은 일체의 적대적 행위를 중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군사적 성격의 ‘임시 협정’이다. 협정에 서명한 유엔군·북한군·중국지원군 등이 군사정전위원회를 구성해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감독한다. 아울러 이를 유엔 등 국제사회에 보고할 중립국 감독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산하에 남북한 주요 항구 감시단도 배치하도록 했다.

이후 70년 동안 정전협정은 한반도의 안보를 규정하는 유일한 국제 협정으로 작동해 왔다. 협정 61·62조에 따르면 수정을 위해서는 서명한 군사령관들의 상호 합의가 있어야 하고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 즉 평화협정에 준하는 규정이 만들어질 때만 대체될 수 있다.

정전협정은 잘못된 결정이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은 완전체가 아니다. 우선 바다 위 군사분계선에 대한 규정이 없다. 협정을 조속히 맺는 과정에서 북한이 점유하고 있던 옹진반도와 유엔군 관할하에 있던 서해 5도 사이에 선을 긋기 어려웠다. 국제법상 영해(12해리·약 22㎞)에 대한 규정도 1982년에야 성립됐다.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다.

정전 체제를 관할하고 위반 사항을 논의하는 군사정전위도 1994년 이후엔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한 측 중립국 감독위원단 대표들도 모두 북한에서 추방됐다. 외부로부터의 무기 반입을 감시하기 위해 항구에 설치된 감시단도 1950년대 중반 모두 해체됐고, 공항을 통한 북한의 소련 무기 반입이 확인되면서 무기 반입 금지 조항도 무효화됐다. 그 직후인 1958년엔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배치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는 당시 대부분의 협정 관련국은 정전협정이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정도 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정전협정 4조에는 90일 이내 정치회담 개최와 한반도 내 외국군 철수, 최후의 평화적 해결책 마련 등이 규정돼 있었다. 이대로 진행되면 정전협정은 정치회담 결론이 나오는 대로 효력을 잃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석 달을 훨씬 넘긴 1954년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했고 베트남만 17도선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사례는 43만 건에 달했다. 지난해 12월 무인기 사태에서 나타났듯 북한 도발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남한의 위반 건수 또한 적잖았다. 하지만 정전협정에는 위반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다. 단지 각자가 ‘적당히’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북한에서 위반자는 영웅이 되고 있다.

이렇게 부실한 상태로 70년을 이어왔다면 애초에 정전협정을 잘못 맺은 건 아닌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1945년까지 정전협정은 전쟁이 일방의 승리로 끝났을 때 임시적으로 체결됐다. 제1·2차 세계대전 때 옛 소련과 독일·이탈리아가 맺은 정전협정도 모두 전쟁의 패배를 인정한 사례였다. 일본의 항복 선언도 일종의 정전협정이었다.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에서 체결된 항복 문서에는 모든 적대 행위 중지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처럼 정전협정은 패전국이 패배를 인정하고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황에서 승전국이 패전국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일단 적대 행위를 중단한 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취지였다. 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참전국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 조정도 필요했다. 배상금 논의가 대표적이다. 과도한 배상금이 부과됐던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됐다. 일본의 항복 이후 6년이 지나서야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이 맺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승전국도, 패전국도 존재하지 않은 한국전쟁에서 정전협정을 맺은 건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을까. 1945년 이후 지구촌에서는 1949년 중동, 1953년 한국, 1954년 베트남, 1962년 프랑스·알제리 분쟁 등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중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1979년 중동에선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평화협정을 맺었고 이후 양국 사이엔 분쟁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한국의 경우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않았음에도 지난 70년간 또 다른 전면전의 발생을 막아왔다는 점이다. 베트남은 정반대였다. 1973년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됐지만 곧바로 전면전이 재개됐고 결국 1975년 남베트남은 패망했다. 이 같은 사례는 한국의 정전협정이 베트남의 평화협정과 달리 전쟁 억지력을 갖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인지, 평화협정이나 종전선언은 정전협정의 유용한 대체물이 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미·중 갈등 속 평화 체제의 조건

평화협정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체결 당사자 상호 간의 인정과 신뢰가 필수적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협정은 물론 정전협정 체결조차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 논의가 진행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 역시 북한을 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포인트는 한국의 정전협정과 베트남의 평화협정 사이에는 체결 당사자 측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경우 남북 베트남과 함께 미국과 남베트남의 베트콩이 평화협정에 서명했고 중국은 참여하지 못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방중 목적 중 하나도 중국이 북베트남에 대해 전쟁 억지력을 작동할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미군과 남한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중국이 함께 서명했다. 한국의 정전 체제에 오늘날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란 두 강대국의 힘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배경이다. 미국은 한·미동맹 70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는 걸 제1의 목표로 삼았다. 또다시 한반도에서 큰 비용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경우에 따라 중국은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전쟁 또는 분쟁 촉진력으로도 작동했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남한의 지원을 막기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했다. 반면 1975년 남베트남 패망 직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자 마오쩌둥은 제2의 한국전쟁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한국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제2의 한국전쟁을 막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남북한과 함께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의 전쟁 억지력 역시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의지는 명확하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그런 만큼 중국이 전쟁 촉진력이 아니라 억지력으로 작용할 때 한반도가 평화로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제쯤 정전협정이 ‘의미 있는’ 평화적 해결책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정전협정 체제에서도 평화는 계속돼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의 미·중 갈등과 대만해협 갈등은 중국이 언제든 한반도에서도 전쟁 촉진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예측하도록 한다. 정전협정 70년이 됐지만 세계사적 흐름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큰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상대가 합리적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을 지냈고 한국역사연구회장과 유엔체제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전쟁』『베트남전쟁』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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