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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전쟁도 그들의 춤을 앗지 못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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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호 31면

‘배어든 전쟁_우크라이나 키이우’, 2023년. ©최형락

‘배어든 전쟁_우크라이나 키이우’, 2023년. ©최형락

모자 차양의 그림자가 남자의 얼굴을 어둡게 해서, 마주 선 여인의 얼굴을 환한 쪽으로 띄워 올리고 있다. 주름진 얼굴들을 마주한 채, 투박한 손을 정중히 서로의 몸에 얹고 춤을 추는 사람들. 여인의 머리를 감싼 연분홍빛 스카프의 실루엣은, 배경으로 흐르고 있을 음악의 선율을 시각화하고 있는 듯하다.

‘전쟁은 총알과 미사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믿는 사진가 최형락의 눈에, 지하철역 안에서 춤을 추는 한 무리 노인들의 그 자그마한 시간이 배어들었을 것이다. 사진의 고전적인 힘을 보여주는 이 사진은, 지극히 고요한데도 보는 이의 가슴을 방망이질해서 자기 안의 울림을 듣게 한다.

언론사 기자로 일하다 프리랜서 사진가로 분투 중인 최형락은, 어떤 사진을 찍더라도 그만의 고요하고 차분한 정서가 사진 속에 함께 담긴다는 평을 듣는다. 심지어 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의 투쟁과 밀양 송전탑 사태를 찍은 여러 사진가들의 ‘현장 사진’들 속에서 그의 사진을 따로 골라낼 수 있을 정도였다. 연평도 포격, 동일본 대지진, 그리스 시리아 난민캠프 사진들이 모두 그러했다.

그런 그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안부와 함께 귀국이 궁금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2022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2주 뒤 최형락은 홀로 먼 서쪽으로 향해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헝가리 국경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올해 3월 다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찾아가,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심의 시민들을 만났다.

키이우의 한 지하철역에서 일요일이면 열리던 시민들의 ‘댄스 모임’은 전쟁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올해 다시 재개되었다. ‘전쟁 중’이라는 엄혹 속에서도 아코디언 소리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노인들의 모습은, 깨지고 흔들렸지만 우크라이나의 일상이 다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폭압도 끝내 그들의 춤을 앗지 못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삶을 다시 희망이게 한다.

최형락의 사진 시리즈 ‘배어든 전쟁’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동료 사진가에게 수여하는 상인 올해의 ‘온빛사진상’을 수상했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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