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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대원도 고글·헬멧 쓸 때…"어린 군인들 로프커녕 맨몸 아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일 0시47분쯤 경북 예천스타디움에서 수색 중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해병 장병을 태운 헬기가 전우들의 경례를 받으며 이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0시47분쯤 경북 예천스타디움에서 수색 중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된 해병 장병을 태운 헬기가 전우들의 경례를 받으며 이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북 예천에서 집중 호우·산사태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던 해병대 장병이 14시간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희생된 장병이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 없이 맨몸으로 강에 들어가 실종자를 수색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군 당국의 ‘안전 불감증’이 도마 위에 올랐다.

20일 경북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지난 19일 오전 9시10분쯤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내성천 보문교 부근에서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포병대대 소속 채모(20) 일병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구명조끼·로프도 없이 강물에…급류 휩쓸려

사고 당시 보문교 부근에서 수색 작업에 나선 해병대원은 39명으로, 이들은 일렬로 4m 정도 거리를 두고 9명씩 ‘인간띠’를 만들어 하천 바닥을 수색했다. 채 일병과 동료 2명은 물속 발아래 지반이 꺼지면서 급류에 휩쓸렸다. 동료들은 수영해서 빠져나왔지만, 채 일병은 급류에 그대로 떠내려갔다.

지난 18일 해병대 1사단 제3포병대대 장병들이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교회 앞 하천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8일 해병대 1사단 제3포병대대 장병들이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교회 앞 하천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고 신고를 받은 119구조대가 헬기와 드론 등으로 채 일병 수색에 나섰다. 채 일병은 오후 11시8분쯤 내성천 고평교 하류 400m 지점에서 발견돼 인양됐다. 채 일병은 해병대 현장지휘소가 차려진 예천스타디움으로 옮겨진 뒤 20일 0시45분쯤 해병대 헬기로 해군포항병원에 옮겨졌다.

채 일병 등 해병대원은 구명조끼나 로프는커녕 아무런 구호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수색작업에 투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온 채 일병 부모는 오열했다. 부친은 중대장에게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많이 왔는데 왜 구명조끼를 안 입혔냐. 구명조끼가 그렇게 비싼가. 이거 살인 아닌가”라고 따져 물었다.

“군인들 산사태 지역 맨몸 투입…‘불안불안’”  

군인권센터도 지난 19일 성명을 내고 “토사·수목 제거 등 수해 복구, 실종자 수색 보조 업무라면 모를까, 하천에 직접 들어가 실종자를 수색하는 임무를 관련 경험이 없는 일반 장병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구명조끼도 갖추지 않고 장병을 물속에 투입하게 된 경위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비판했다.

지난 18일 해병대신속기동부대 대원들이 집중호우로 실종자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하천에 투입돼 실종자 수색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8일 해병대신속기동부대 대원들이 집중호우로 실종자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하천에 투입돼 실종자 수색을 하고 있다. 뉴스1

해병대뿐 아니라 육군 등 다른 병과 장병 역시 헬멧 등 안전장비 없이 산사태 피해 지역 복구 작업에 투입됐다. 산사태로 실종자 2명이 발생한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한 주민은 “어린 군인들이 헬멧이나 무릎보호대 등 안전장비 없이 산사태로 무너진 건물 등을 건너다니는 것을 보고 위태롭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반면 함께 수색·복구 작업에 나선 119 구조대원들은 주변 상황에 따라 헬멧과 고글·구명조끼 등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경북119특수대응단 관계자는 “산사태가 난 지역은 추가 낙석이나 붕괴 위험이 있고 자칫 발을 헛디뎌 추락하거나 급류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며 “겉으로 보기에 위험해 보이지 않더라도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 안전장비를 착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육군 제50보병사단 장병들이 119대원들과 함께 집중호우로 실종자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은풍면 벌방리에서 합동 수색작업을 펼치고있다. 뉴스1

지난 17일 육군 제50보병사단 장병들이 119대원들과 함께 집중호우로 실종자가 발생한 경북 예천군 은풍면 벌방리에서 합동 수색작업을 펼치고있다. 뉴스1

이와 관련해 해병대사령부는 20일 성명을 내고 “예천 지역 호우 피해 복구작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해병대원 명복을 빌며 유족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현재 해병대 수사단은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며 해병대 안전단은 호우피해 복구 작전에 투입된 부대 안전분야에 대해 현장에서 점검하고 보완 중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순직한 해병에 대해 예우를 최고 수준으로 갖춰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덧붙였다.

비 예보 주말 전까지 실종자 3명 수색 총력

한편 이번 집중 호우·산사태에 따른 경북 지역 실종자 수는 3명으로 줄었다. 19일 추가로 2명을 발견하면서다. 이날 오전 10시26분 예천군 개포면 동송리 경진교 부근에서 70대 남성 실종자 1명, 오후 4시38분쯤 예천군 은풍면 우곡리 사과밭에서 50대 여성 실종자 1명을 각각 발견했다. 남은 실종자는 산사태로 매몰 사고가 일어난 감천면 벌방1리 주민 2명, 급류에 휩쓸려 실종된 은풍면 금곡리 주민 1명이다.

지난 15일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에서 집 여러채가 토사에 매몰되거나 쓸려간 가운데 경북소방본부 소속 구조대원이 안전장비를 갖추고 수색과 구조에 나서고 있다. 사진 경북소방본부

지난 15일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에서 집 여러채가 토사에 매몰되거나 쓸려간 가운데 경북소방본부 소속 구조대원이 안전장비를 갖추고 수색과 구조에 나서고 있다. 사진 경북소방본부

구조당국은 20일 인력 3486명과 굴삭기 등 장비 1276대를 동원해 실종자 수색과 피해 복구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전날에 이어 날씨가 맑은 만큼 헬기를 동원해 지상·공중 수색을 병행하기로 했다. 특히 주말인 22~23일 다시 기상이 악화할 것으로 예보돼 21일까지 최대한 실종자를 찾아낼 방침이다.

재난 수습 과정에서 실종자를 찾던 군인들이 숨지는 '2차 참사'는 전에도 있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때 한주호 준위가 수색 작전 중 잠수병으로 순직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도 민간 잠수사가 선체 수중 절단 작업 중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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