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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존 스튜어트 밀, 고독과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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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세계적 명저로 꼽히는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생애는 고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3세 때부터 라틴어를 가르치고 그리스 고전을 읽도록 했다. 밀은 8세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을 논박하는 글을 썼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당대의 대학자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밀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릴 만큼 삶이 힘들었다. 그는 “나에게는 소년 시절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같은 또래들보다 25년 조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거의 없다. “엄마는 차가운 대리석 같았다”는 한 구절만 생각난다. 젊은 시절 한때 돈이 안 드는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는데, 하느님도 그런 선거에서는 낙선했을 것이다.

신영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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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은 애 딸린 유부녀를 사랑했다. 해리엇 테일러라는 그 여인은 교양과 지성과 미모를 두루 갖췄다. 밀은 “내 생애에 여인을 사랑한 추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45세에 테일러와 결혼했다.

테일러는 밀에게 친구이자 동료 학자이자 어머니였다. 부부는 남부 프랑스 명승지인 아비뇽을 여행하며 『자유론』 탈고를 준비하다가 1858년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자유론』의 서문은 ‘아내에게 바치는 글’이 됐다. 밀은 아내를 아비뇽에 묻고 그 무덤 옆에서 15년을 더 살다가 영면했다.

밀은 늘 아내의 무덤 주위를 산책했는데, 그럴 때면 한 청년이 무덤 곁에서 땅을 파며 무엇을 찾고 있었다. 아비뇽 중학교의 물리 담당 교사로 벌레를 공부한다고 했다. 형편이 넉넉한 것 같지 않았다. 밀은 그의 탐구심을 기특하게 여겨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그가 뒷날 저 유명한 『곤충기』를 남긴 앙리 파브르(1823~1915)였다. 천재는 그렇게 소설 같은 삶을 살다 갔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