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태 어둠 속, 빛이 된 벌방리 3총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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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외침 안 놓친 최병일씨, 물찬 집 고립 할머니 구한 유재선씨, 문 막힌 이웃 창문 구조 박우락 이장(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살려주세요, 거기 사람 없어요’ 목이 터져라 외치는데 멀리서 깜빡깜빡 빛이 보이는 거라. 아이고 살았구나 했지. 3분만 늦었어도 저세상 갔을 거야.”

지난 15일 새벽 거대한 바위와 토사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에서 산사태에 휩쓸린 한영훈(62)씨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세주’를 마주한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100명 남짓 사는 이 마을에선 산사태로 2명이 실종됐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이 많아 인명 피해가 훨씬 커질 수도 있었지만, 여러 주민은 “큰 돌덩이와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쏟아지는 그 새벽에도 이웃을 구하려고 손전등을 들고 뛰어다닌 사람들이 있어 더 큰 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 이장인 유재선(65)씨와 박우락(62) 현 이장, 한씨를 구조한 최병일(59)씨다.

유재선씨는 그날 새벽 주민들의 대피를 돕던 중 산사태가 난 길 끝에 사는 할머니 두 명이 떠올랐다고 한다. 길이 막히고 잠겨 마을회관 뒤쪽 담장을 뛰어넘은 그는 재빨리 할머니들이 사는 집으로 향했고, 식탁 위에 겨우 피해 있던 할머니를 발견했다. 유씨는 할머니를 마을회관에 모시고 난 뒤 다시 산사태 현장으로 달려갔다. 건너편에서 가게를 하던 다른 할머니가 무너진 구조물 사이에 갇혀 있었다. 유씨는 구조물 틈새로 손을 뻗어 할머니를 구했다.

박우락 이장도 그날 새벽 내내 마을을 뛰어다녔다. 그는 산사태가 나기 전날 밤에도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회관이나 교회로 대피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수십년간 산사태가 난 적이 없어 새벽 이동을 꺼렸던 이들을 설득해 고지대로 대피시켰다. 주민 안모(74)씨는 “혼자 사는데 현관문이 흙에 막혀 안 열리니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흙이 덜 쌓인 창문으로 나가려는데 다리를 다쳐 힘들었다. 그때 박 이장님과 목사님이 나타나 창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줬다”고 고마워했다.

토사에 휩쓸린 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이웃 주민 한씨를 구한 건 최병일씨였다. 지난 주말 지인의 농사를 도우려 벌방리를 찾은 한씨는 차량을 안전지대로 옮기던 중 거대한 충격과 함께 마을 아래쪽으로 휩쓸려 내려갔다.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차량에서 깨진 창문으로 겨우 빠져나왔지만 마을 전체가 정전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산에선 흙탕물과 토사가 계속 밀려 내려왔다. 결국 이동은 포기한 채 “살려주세요. 거기 없어요”라고 외쳤다. 잠시 뒤 그를 살린 건 순찰을 하고 있던 최씨였다. 그는 손전등을 비춰 한씨가 나올 수 있는 길을 찾고, 손을 뻗어 탈출을 도왔다. 3분도 안 돼 한씨가 빠져나온 장소로 대규모 토사가 쏟아지며 차량 위를 덮쳤다. 그는 “최씨를 못 만났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이들 ‘벌방리 삼총사’는 한사코 자신이 한 일을 말하길 꺼렸다. 박 이장은 “내가 했던 행동이 과장돼 알려지는 것은 안 된다”며 말을 아꼈다. 최씨는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도 있나. 당연한 일이지”라며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유씨도 “전에 이장도 해서 할머니들 집 위치를 잘 알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그들은 “다른 주민들도 모두 함께 고생했다”고 입을 모았다. 벌방리 주민들은 17일에도 실종자를 찾기 위해 군·경·소방 인력과 함께 인근 하천 일대를 수색했다.

윤정민·김홍범·이영근 기자 yunj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