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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만 늦었어도 저세상"…손전등 든 구세주 '벌방리 삼총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00명 남짓 사는 마을인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16일 굴착기 등 장비들이 토사를 치우고 있다. 김홍범 기자

100명 남짓 사는 마을인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16일 굴착기 등 장비들이 토사를 치우고 있다. 김홍범 기자

“‘살려주세요, 거기 사람 없어요’ 목이 터지라 외치는데 멀리서 깜빡깜빡 빛이 보이는 거라. 아이고 살았구나 했지. 3분만 늦었어도 저세상 갔을 거야.”

 거대한 바위와 토사가 마을 한가운데를 관통한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서 산사태에 휩쓸린 한영훈(62)씨는 급류 한복판에서 ‘구세주’를 마주한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마을에선 산사태로 2명이 실종됐다. 마을엔 1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다수가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이며, 산사태 경로 양옆에 있는 집만 10곳을 훌쩍 넘는다. 인명피해가 훨씬 커질 수도 있었지만, 여러 주민은 “큰 돌덩이와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쏟아지는 그 새벽에도 이웃들을 구하려고 손전등을 들고 뛰어다닌 사람들이 있어 더 큰 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 이장인 유재선(65)씨와 박우락(62) 현 이장, 한씨를 구조한 최병일(59)씨 등 ‘벌방리 삼총사’가 그들이다. 벌방리는 마을 뒤 주마산 줄기가 마을 앞까지 닿아 문벌이 번성하리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016년부터 마을 이장을 지내다 지난해 1월 물러난 유재선(65)씨는 15일 새벽 주민들의 도피를 돕던 도중 산사태 경로를 지켜보다 그 길 끝에 사는 할머니 2명이 떠올랐다고 한다. 길이 막히고 잠겨 마을회관 뒤쪽 담장을 뛰어넘은 그는 재빨리 할머니들이 사는 집으로 향했고, 거센 물살이 집을 관통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식탁 위에 올라가 있던 할머니를 발견했다. 곧장 그를 구해 집을 빠져나온 그는 마을 회관에 할머니를 데려다준 뒤 다시 산사태 발생 장소로 이동했고, 건너편에서 가게를 하던 다른 할머니가 무너진 구조물 사이에 갇혀 있는 것을 봤다. 그리고 구조물 틈새로 손을 뻗어 할머니를 구출한 뒤 다시 회관에 대피시켰다.

지난 15일 오전 3시쯤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 산사태가 발생한 직후 주민 구조 활동에 나선 최병일(59), 유재선(65), 박우락(62)씨. 김홍범 기자

지난 15일 오전 3시쯤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 산사태가 발생한 직후 주민 구조 활동에 나선 최병일(59), 유재선(65), 박우락(62)씨. 김홍범 기자

 “재선씨가 그 할머니들 구한 걸 보고 얼마나 목이 메고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당시를 회상한 박 이장 역시 유씨와 마찬가지로 할머니들의 안위를 확인하러 새벽 내내 마을을 뛰어다녔다. 그는 산사태가 나기 전날 밤에도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회관이나 교회로 대피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수십년간 산사태가 난 적이 없어 새벽 이동을 꺼렸던 이들을 설득해 고지대로 대피시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산사태로 집 대문과 담벼락이 흔적도 없이 무너진 주민 안모(74)씨는 “혼자 사는데 현관문도 흙에 막혀 안 열리니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흙이 덜 쌓인 창문으로 나가려는데 다리를 다쳐 힘들었다. 그때 박 이장님과 목사님이 나타나 창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줬다”고 고마워했다.

 차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한씨를 구한 건 최씨였다. 지난 주말 지인의 농사를 도우려 벌방리를 찾은 한씨는 15일 새벽 3시쯤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에 차량을 안전지대로 옮기려고 시동을 걸었지만 곧 뒤통수를 때리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마을 아래쪽으로 휩쓸려 내려갔다. 당시엔 산사태인 줄도 몰랐던 그는 차가 구덩이에 빠져 가까스로 멈추자, 차량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씨는 “차 안에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냥 죽는구나 했는데, 차 뒤쪽에 구멍 같은 게 보였다. 사람 하나 겨우 통과할 크기였는데, 나중에 보니 창문이 어디 부딪혀 깨진 거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탈출 뒤도 문제였다. 마을 전체가 정전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산에선 차를 덮친 물과 토사가 계속 밀고 내려왔다. 언제 휩쓸릴지 몰랐다. 결국 이동은 포기한 채 “살려주세요. 거기 없어요”라고 외쳤다. 잠시 뒤 그를 살린 건 마을 어르신들을 대피시키려 순찰을 하고 있던 주민 최씨였다. 그는 손전등을 비춰 한씨가 나올 수 있는 길을 찾고, 손을 뻗어 탈출을 도왔다. 3분도 안 돼 한씨가 빠져나온 장소로 대규모 토사가 내려왔고, 그가 서 있던 차량 위를 휩쓸었다. 그는 “그 새벽에 최씨를 못 만났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유재순(65)씨는 지난 15일 식탁 위에 올라가 있던 할머니 한 분을 구출해 이동했다. 김홍범 기자

유재순(65)씨는 지난 15일 식탁 위에 올라가 있던 할머니 한 분을 구출해 이동했다. 김홍범 기자

 그러나 이들 셋은 한사코 자신이 한 일을 말하길 꺼렸다. 박 이장은 “지금도 우리 마을 실종자 2명을 못 찾고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며 “내가 했던 행동이 과장되어서 알려지는 것은 안 된다”며 말을 아꼈고, 최씨 역시 당시 상황을 묻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도 있나. 당연한 일이지”라며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유씨도 “전에 이장도 해서 할머니들 집 위치를 잘 알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모두 “나만 나선 것이 아니라 목사님과 다른 주민들도 함께 고생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 벌방리 주민들은 17일에도 실종자 2명을 찾기 위해 군ㆍ경ㆍ소방 인력과 함께 인근 하천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지난 15일 산사태 발생 당시 차량에 있다가 휩쓸린 한영훈(62)씨는 "최병일(59)씨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지난 15일 산사태 발생 당시 차량에 있다가 휩쓸린 한영훈(62)씨는 "최병일(59)씨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홍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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