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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자작 뒤 와르르" 노부부 숨진 그 마을, 62년전 악몽 떠올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5일 오후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80대 노부부가 살던 집이 뒷산에서 쏟아진 토사에 파묻혀 지붕과 벽체만 간신히 남아 있다. 안대훈 기자

15일 오후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80대 노부부가 살던 집이 뒷산에서 쏟아진 토사에 파묻혀 지붕과 벽체만 간신히 남아 있다. 안대훈 기자

지붕 높이 쌓인 흙더미…파묻힌 80대 노부부 집  

15일 오후 7시쯤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3리마을. 뒷산 바로 아래엔 주택 3동 뒤편에는 3m 높이 지붕에 닿을 만큼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토사를 쏟아낸 뒷산에는 길이 20m, 폭 3m쯤 돼 보이는 계곡이 생겼을 정도였다.

흙더미 속에는 영양제, 안경통, 이불과 베개 등 누군가 쓰던 물건들이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지붕과 벽체만 간신히 남은 집 한 채도 있었다. 주방만 남긴 채 안방이 토사에 묻혀 있었다. 13시간 전인 오전 6시 10분쯤 산사태로 매몰된 송모(84)·김모(83)씨 부부가 살던 집이다. 소방당국은 구조작업을 시작한 지 각각 3~5시간 만에 송씨 부부를 발견했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서 발생한 산사태 피해 현장. 안대훈 기자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서 발생한 산사태 피해 현장. 안대훈 기자

“흙더미와 통나무 물결치듯 쏟아져”

대피소인 마을노인회관에서 만난 송모(70·여)씨는 산사태 발생 순간부터 봤다고 했다. 거센 장맛비에 일찍 잠에서 깬 송씨는 거실에서 TV를 보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짜자작’ 나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두 번 나길래 집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뒷산에서 (노부부 집 쪽으로) 흙더미와 통나무가 물결치듯 쏟아졌다”고 말했다. 놀란 송씨는 다른 집을 향해 “나와라” “나와라!” 외치며 마을 이장집으로 가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송씨 옆집에 살던 장모(82)씨 부부는 그 외침에 잠옷바람으로 나섰다. 장씨는 “‘쾅쾅’ 하더니 흙더미가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며 “‘나오라는 얘길 조금만 늦게 들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했다. 그는 “(사망한 노부부 집은) 이미 토사가 덮쳤다”며 “걱정된 마음에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다”고 했다.

숨진 송씨 부부 빈소에서 만난 사위 김모(61)씨는 “없는 시절, 정말 열심히 해서 자녀들을 키우셨던 분인데…”라며 착찹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흙더미가 지붕 높이 만큼 쌓여 있다. 안대훈 기자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흙더미가 지붕 높이 만큼 쌓여 있다. 안대훈 기자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의 한 노인회관에 대피한 마을주민들이 긴급 구호물품을 받고 있다. 안대훈 기자

1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의 한 노인회관에 대피한 마을주민들이 긴급 구호물품을 받고 있다. 안대훈 기자

“62년 만에 이런 피해는 처음”…수해 악몽 떠올린 주민들

장수면 주민 41명은 현재 경로당·마을회관 등에 대피해 있다. 마을노인회관으로 대피한 갈산3리마을 주민 약 20명은 “62년 만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고 입을 모았다. 대부분 70대 이상으로, 1961년 겪었던 수해 악몽이 떠올랐다고 했다. 송귀익(70) 마을 이장은 “신축년(1961년) 태풍 때 제방이 무너지면서 옥계천이 범람, 마을이 쑥대밭이 된 적 있다”며 “초등학생 때 겪었던 악몽이 떠올라 두려웠다”고 했다.

경북 영주에는 지난 13일부터 이날 오후 5시까지 351.5㎜의 비가 쏟아지며 곳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오전 7시 27분쯤 풍기읍 삼가리에서도 쏟아진 토사에 집에 있던 일가족 3명이 매몰됐다. '산사태로 몸이 깔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약 2시간 만에 아빠 김모(67)씨와 딸(25) 그리고 엄마 정모(58)씨 구조했지만, 아빠와 딸은 숨졌다.

"지금도 돌 구르는 소리가"…뜬눈으로 밤새우는 봉화 주민들

15일 새벽 경북 봉화군 학산리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모습. 사진 독자

15일 새벽 경북 봉화군 학산리에서 산사태가 발생한 모습. 사진 독자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사망자 4명이 발생한 경북 봉화군 주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봉화군 학산리 경로당에 모인 김필규(81)‧이순영(77)‧이영순(67)‧장영선(77)씨는 이날 새벽 내내 산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자 급하게 집을 떠나 경로당으로 모였다. 산비탈 인근에 거주하는 이들은 이번 장마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한다. 이순영씨는 “이곳 봉화로 시집을 온 지가 50년이 넘었는데 이런 비를 본 적도 없고, 비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도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15일 경북 봉화군 곳곳은 산사태로 도로가 통제됐다. 김홍범 기자

15일 경북 봉화군 곳곳은 산사태로 도로가 통제됐다. 김홍범 기자

경로당에서 차로 5분가량 떨어진 지역에선 이날 새벽 50대 하모씨 부부가 산사태로 사망했다. 피해 부부는 노모를 모시기 위해 2010년대 초반 이곳 학산리에 집을 구해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하씨 부부는 여름이 제철인 블루베리 농사일이 많아 지난 14일 늦은 밤에 귀가 뒤 변을 당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 구경난(59)씨는 “갑자기 발생한 일이기도 하지만, 피곤해서 징후가 될 만한 소리 등도 듣지 못한 것 같다. 친절했던 부부에게 변고가 생겨 너무 속상하다”며 “우리 집도 2만평 사과 농사를 하는데 올해 농사는 이미 포기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봉화군 서동리에서도 산사태로 주택이 매몰돼 60대 여성과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남성 1명 등 2명이 숨졌다.

이날 폭우가 쏟아진 경북에서는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북도소방본부에 따르면 오후 9시 기준 인명피해는 사망 17명, 실종 9명, 부상 5명으로 집계됐다. 지역별로 사망자는 예천 7명, 영주 4명, 봉화 4명, 문경 2명이고, 실종자 9명은 모두 예천에서 발생했다. 이들 사상자는 산사태로 주택 등이 매몰되거나 불어난 물에 휩쓸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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