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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은 타살 아닌 자살로 몰락한다, 안정화의 역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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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15면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끝〉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인류 최초의 제국인 페르시아에서 지금까지 많은 제국이 명멸했다. 제국이란 단순히 영토가 크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문화와 혈통이 다른 많은 민족들을 품어 하나로 만들 수 있어야 하기에 군사력 이상의 역량이 필수다. 제국을 세우는 데는 군사력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함을 진화시키지 못하고 사라져 간 제국들이 대체로 이랬다. 강력함을 만들 수 있었으니 지속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엔 세상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인 안정성 지향도 큰 몫을 차지한다. 안정 지향은 당연한 건데, 왜 이게 망국을 초래할까? 세계적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윈이 제시한 ‘최적자 생존’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가 있다고 한다. ‘안정자 생존’이다. 세상의 원리를 이 개념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건데 예를 들어, 비누 거품이 둥근 모양인 건 구형이 안정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소금이 입방체를 이루는 경향은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함께 있어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흐르는 혈액 속 헤모글로빈 역시 마찬가지다. 헤모글로빈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 사슬, 그러니까 574개의 아미노산 분자가 그들만의 안정적인 질서로 배열되어 있어 우리가 지금 숨 쉴 수 있다. 자연선택은 이런 식으로 안정을 지향하고 선택한다. 1027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본질이 이러니 행동에서도 안정 지향은 일반적이다. 외부 환경이 안정되면, 자연선택은 내부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화생물학자 제리 코인이 이런 말을 했다. “자연선택에서 가장 흔한 건, 종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이게 아니라면 뭘까? 앞에서 말한 ‘최적자 생존’ 지향이 여기서 나타난다. 어떤 생명체가 변화한 환경에 맞게 몸 크기를 진화시켜 삶을 안정화시켰다면, 그 다음엔 이 최적화된 크기를 제외한 다른 개체들을 걸러내는 안정화 선택을 시작한다. 인간 사회의 경우, 외적의 침입 같은 상황이 되면 전체를 안정화시키는 최적화된 인물들이 발탁되지만, 이게 해결되면 지향이 바뀐다. 내부 경쟁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개인 차원, 특히 기득권의 안정화 전략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공동체를 불행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개인들의 안정 지향이 자신들도 모르게 단기적 안정, 그러니까 미래가 아닌 현재 고수, 가진 것 지키기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고통과 손실을 멀리하는 흐름이 확산되면서 행복을 원하지만 불행을 피하는 걸 우선하고, 기쁨도 좋지만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여기며 이득도 중요하지만 손해 보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더 나은 미래? 가능하겠지만 당장 시급한 건 지금 현재를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지키는 게 우선이고 성장은 그 다음이다.

이상한 건, 모두들 이렇게 안정을 갈구하는데, 전체의 안정은 약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생산적 경쟁 대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제로섬 경쟁이 횡행하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등 내부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제국을 연구한 피터 터친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이 과정을 14세기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이 말한 아사비야(asabiya)로 설명한다. 아사비야는 사회집단이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 그러니까 결속력이라 할 수 있는데, 집단 내부의 안정화 성향이 강해질수록 아사비야는 약해진다. 그 결과,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 “대제국은 타살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로 죽는다.” 외부에 의해 무너진다 해도 이미 내부적으로 무너져 있기에 그렇게 된다. (동)로마가 천년 왕국을 유지한 비결 역시 이 아사비야에 있었다. 식민지 출신을 차별하지 않는 등 불평등을 줄이려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게 사라지자 로마 역시 사라졌다.

이런 일은 지금도 드물지 않다. 이제는 사라진 거대 기업들의 말기 특징은 약속이나 한 듯 비슷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혁신적인 제품 개발 대신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높이는 일에 에너지를 쏟았다. 실패할 일은 남에게 전가하고, 특권을 추앙하며, 일보다 관계를 중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 등을 만드는 일을 우선했다. 걸림돌이 되는 이들을 배제하고 제거한 건 당연했고 말이다. 그렇게 안정을 열망했지만 결과는? 소멸이었다.

왠지 낯익은 느낌이 든다면, 먼 나라 얘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안정화 지향이 강해지면서 이런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개인의 안정화 지향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신호다. 연구에 의하면, 불평등은 의외로 자연적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발생하기에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뇌는 현재보다 새로운 것을 지향할 때 더 활성화되고, 이걸 이루었을 때 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우리의 핵심역량인 뇌가 이렇게 작동한다는 건, 우리가 가진 걸 지키기보다는 새로운 걸 추구하면서 살아왔다는 증거다. 우리 안의 이 오랜 힘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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