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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 람스의 SK4 오디오 혁신, 애플이 오마주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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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20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브라운 SK4. 디터 람스의 초기 디자인을 게르트 뮐러, 한스 구겔로트가 다듬었다. [사진 Braun]

브라운 SK4. 디터 람스의 초기 디자인을 게르트 뮐러, 한스 구겔로트가 다듬었다. [사진 Braun]

브라운(Braun) 사의 SK4는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한 오디오 중 하나다. USM Haller 모듈러 랙, 루이스 폴센 조명과 함께 한국의 거실 인테리어를 지배했다. 유독 SK4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디자이너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신화 덕분이다. SK4의 위대한 디자인은 디터 람스 한 사람의 결과물이 아닌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한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유산이다.

바우하우스 예술 정신 잇는 대학 개교

1930년대 독일 오디오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보급률을 자랑했지만 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내리막을 걷는다. 종전 후 피폐했던 독일인의 삶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부흥을 통해 빠르게 회복했다. 나치가 배급한 국민 라디오는 선동 대신 미군 방송의 재즈로 가득 채워졌다. 1950년대 여유로워진 독일인들은 구형 라디오가 아닌 최신 기술로 무장한 오디오를 원하기 시작했다.

그즈음 20년 전 나치의 탄압으로 사멸한 바우하우스를 부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졸업생 디자이너 막스 빌(Max Bill)은 반나치 운동가 아이어 부부와 함께 1953년 독일 남부 도시 울름(Ulm)에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잇는 울름 조형 대학을 개교한다. 이들의 탁월함을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이 오디오 기업 브라운이었다.

브라운은 1921년 엔지니어 막스 브라운(Max Braun)이 창업한 기업으로, 1923년 독일 라디오 방송 개시와 함께 라디오 제조를 시작해 라디오와 축음기가 결합된 고급 모델로 큰돈을 벌었다. 전쟁으로 운영을 중단, 종전 후 재개하지만 그 사이 오디오 시장의 패권은 미국이 차지했다. 창업자가 세상을 떠나며 성장 동력을 잃은 브라운은 어느덧 미국 오디오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경영권을 이어받은 2세 에르빈, 아르투르 브라운 형제는 브라운만의 디자인 언어를 추구했다. 두 사람은 20년 전 사라진 바우하우스에 주목했다. 에르빈은 바우하우스 출신 산업 디자이너 빌헬름 바겐펠트(Wihelm Wagenfeld)를 찾았고 아르투르는 바우하우스의 적자인 울름 조형 대학과 계약을 맺는다. 1950년대 초 브라운 오디오는 빌헬름 바겐펠트, 울름 조형 대학교수와 학생이 조화를 이루며 디자인했다. 이들의 혁신적인 디자인은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해 애플 디자인에 영향을 준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 [중앙포토]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해 애플 디자인에 영향을 준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 [중앙포토]

이 시기 브라운을 선망한 22세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있었다. 디터 람스는 1932년 비스바덴에서 태어나 목수 장인인 조부의 영향으로 비스바덴 예술 대학에서 건축,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오토 아펠 건축 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한다. 10대 때 재즈에 깊이 빠졌던 그는 오디오에 높은 관심을 가졌고 브라운의 아름다운 디자인은 그를 추동했다. 결국 1955년 브라운으로 이직한다. 주로 브라운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다 제품 디자인에 점차 두각을 나타내자 브라운 형제가 기회를 준다. 디터 람스는 포터블 라디오 Explorer2를 시작으로 제품 디자인에 주력한다.

당시는 임스 부부가 목재 위주의 가구 시장에 신소재 플라스틱을 도입해 돌풍을 일으킨 때였다. 자극을 받은 디터 람스도 목재 일색의 오디오에서 탈피하고자 했고 그가 택한 소재는 메탈이었다. 이를 가장 먼저 도입한 모델이 바로 SK4다. 하지만 메탈로 변경한 그의 초기 디자인은 차갑고 이질적이었다. 디터 람스의 거친 디자인을 매만져 지금의 SK4로 업그레이드한 주역은 울름 조형대학 교수이자 브라운 디자인을 주도한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다.

그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 중 프레임, 레이아웃, 버튼만 살리고 대폭 수정을 가했다. 턴테이블은 빌헬름 바겐펠트의 기존 설계를 가져오고 톤암은 훗날 라미 만년필로 명성을 얻는 게르트 뮐러에게 맡겨 풍윤한 유선형으로 다듬었다. 최종적으로 한스 구겔로트가 제품 컬러를 따스한 화이트로 변경하고 측면에 우아한 우드 패널을 부착했고, 제품 상단에 아름다운 투명 아크릴 커버를 더했다.

브라운 L2.(1958) 스피커 본체는 1956년 발표된 임스 부부의 스피커 E 시리즈를, 스탠드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를 참고했다. [사진 Braun]

브라운 L2.(1958) 스피커 본체는 1956년 발표된 임스 부부의 스피커 E 시리즈를, 스탠드는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를 참고했다. [사진 Braun]

브라운 디자인팀이 조화를 이룬 SK4는 발매 후 빅 히트를 기록했고 주요 디자인 어워드를 휩쓸었다. SK4 히트로 브라운은 오디오 디자인계를 이끄는 리더가 되었고 원형(原型)을 디자인한 디터 람스의 명성 또한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에 고무된 브라운 형제는 디터 람스에게 더 많은 권한과 기회를 제공했고 이례적으로 가구 업체 비초에(Vitsoe) 외부 작업도 허락했다.

디터 람스는 브라운 디자인팀의 바우하우스 후예와 작업하며 그들의 디자인 DNA를 오롯이 흡수했다. SK5 히트로 기획한 상위 모델 Atelier+L1을 디자인할 때에는 이전의 한스 구겔로트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스피커 L2, L20에서 선보인 강철 파이프 스탠드도 바우하우스 출신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에 쓰인 디테일을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디터 람스는 브라운 디자인팀과 협업하며 턴테이블 PC3, 면도기 DL5, 포터블 라디오 T5 등 명기(名機)를 쏟아냈다.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28세의 나이로 브라운 디자인 팀장에 오른다.

1950년대 독일 오디오 산업은 미국에 주도권을 넘겨준 채 열패감에 빠져 있었다. 독일 사회는 그들의 자긍심을 일깨워줄 스타를 요구했고 출중한 디자인 실력에 젊고 잘 생긴 디터 람스는 제격이었다. 디터 람스는 TV 쇼에 출연하며 독일을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로 부상한다.

60년대 디터 람스의 인지도는 급성장한 반면 브라운의 디자인은 정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울름 조형 대학팀이 60년대 초부터 브라운을 떠나기 시작했고 또 다른 디자인팀을 이끌던 한스 구겔로트도 1965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바우하우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교수 간의 반목, 정부 지원 취소로 몸살을 앓던 울름 조형 대학도 개교 15년 만인 1968년 문을 닫았다. 이제 브라운에 디터 람스만 남았다.

브라운 오디오 매출은 감소하기 시작했고 이제 브라운의 캐시카우는 오디오가 아닌 면도기가 됐다. 브라운의 면도기 사업을 탐낸 미국 질레트가 1967년 브라운을 인수한다. 다행히 질레트는 인수 후에도 브라운의 오디오 사업을 유지했다. 이에 디터 람스는 기존의 브라운과 다른 새로운 ‘블랙 앤 실버’ 디자인을 선보이지만 시장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적은 것이 더 낫다’ 디자인 10계명 완성

질레트는 널리 알려진 스타 디터 람스를 홍보해 더 많은 면도기를 판매하고자 했고 디터 람스는 전 세계를 순회하며 브라운의 디자인 철학을 설파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브라운 선배로부터 익힌 바우하우스 개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교장을 역임한 미스 반 데 로에의 격언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를 “적은 것이 더 나은 것이다.(Less, But Better.)”로 고쳐 쓰는 등 디자인 10계명을 완성해 세상에 천명했다.

1980년대 들어서자 질레트는 수익성이 떨어진 브라운 오디오 사업 중단을 결정한다. 이후 사내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던 디터 람스는 경영진과 관계가 소원해지며 결국 퇴사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잊혀졌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그를 세상에 다시 소환한 것은 바로 애플이다. 애플의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가 디터 람스에 대한 존경을 언급하며 애플 제품이 그를 오마주한 것이라 언급했기 때문이다. 2008년 일본의 디터 람스 전시 이후 그의 명성은 다시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70대에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그는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하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디터 람스 신화는 브라운, 바우하우스, 스티브 잡스가 뒤섞여 있다. 높은 평가를 받는 그의 작품은 1956년부터 1962년 사이로 한정되어 있고 이들 대부분은 디터 람스 혼자가 아닌 울름 조형 대학과 협업이 있어 가능했다. 디터 람스는 흔히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스티브 잡스가 선택한 디자이너는 브라운의 경쟁사 베가(WEGA)의 디자인을 담당한 하르트무트 애슬링거였다.

디터 람스는 바우하우스와도 직접적인 접점은 없다. 다만 그는 브라운을 통해 바우하우스 출신 디자이너와 작업하며 영민하게 그들의 바우하우스 DNA를 흡수했다. 그리고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을 정립한 ‘디자인 10계명’을 전파하며 예술 혁명 바우하우스를 세상에 알렸다. 100년 전 소멸한 바우하우스를 지금 우리가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디터 람스 그리고 그를 추앙한 애플 덕분이다.

하지만 디터 람스 이후 독일 오디오 산업은 그를 잇는 후계자를 내놓는데 실패했다. 브라운의 오디오 디자인 DNA는 흥미롭게도 덴마크로 이어진다. 브라운이 회사를 매각한 1967년, 덴마크 오디오 기업 뱅앤올룹슨이 브라운의 성공 방식을 쫓아 산업 디자이너 야콥 옌센을 맞이해 전설적인 턴테이블 베오마스터 5000을 발표한다. 이후 오디오 디자인 신을 30여년간 지배한 것이 야콥 옌센과 뱅앤올룹슨 듀오였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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