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디자이너 임스 부부, 음악 감상에 스타일을 입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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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호 27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2차 세계 대전은 원자폭탄을 독일 나치보다 먼저 완성한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패권국 지위에 오른 미국은 기술 종주국까지 자처했다. 전쟁이 낳은 기술 혁명 아래 스테레오, FM 라디오, 컬러 TV, LP의 신기술이 쏟아졌고, 이들은 미국에서 탄생해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가구도 전통적 목재에서 벗어나 전쟁으로 얻은 신소재인 플라스틱과 금속을 도입하며 미드 센추리 모던(Mid Century Modern)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냈다. 미드 센추리 모던의 선두에 서며 이를 가장 먼저 오디오에 도입한 디자이너가 임스 부부다.

임스 부부, 100여편 단편영화도 제작

E1S는 스위블 베이스를 채택해 가장 임스다운 스피커로 꼽힌다. [사진 eames office]

E1S는 스위블 베이스를 채택해 가장 임스다운 스피커로 꼽힌다. [사진 eames office]

1950년대 이전의 오디오 디자인은  존재감이 없었다. 지금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은 극장용 스피커로 거대한 궤짝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디자인을 논할 수 조차 없었다. 가정용 오디오 또한 독창적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가구를 모방했다. 거실의 콘솔 안에 오디오를 우겨 넣은 이른바 ‘장전축’이 주류를 이뤘다. 이 시기 오디오는 무척 비쌌기 때문에 귀족과 상류층의 전유물로 남았는데, 디자인 또한 이들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이 시기 오디오 디자인이 움튼 분야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는 장전축과 비교해 10분의 1 이하로 저렴했고 무엇보다 비싼 음반을 사지 않고도 24시간 내내 음악을 마음껏 즐길 수 있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상류층의 고루한 취향을 신경쓰지 않고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은 디자이너들의 맘을 사로 잡았다. 디자이너 이사무 노구치가 가전 업체 제니스(Zenith)의 의뢰로 설계한 라디오 ‘너스(Nurse)’가 대표작이다. 이사무 노구치의 첫 외주 작품인 너스는 이국적인 디자인으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에 고무된 제니스는 다시 한 번 신인 디자이너에게 라디오 디자인을 맡겼고, 무려 20만대가 판매되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이 신인 디자이너가 바로 임스 부부다.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두 사람은 디자인 학교 크랙브룩 아카데미에서 선후배로 만났다. 찰스 임스와 에로 사리넨이 준비하던 가구 공모전 작업에 레이 임스가 보조로 참여하며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알바 알토와 마르셀 브로이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 공모전에서 찰스 임스는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1941년 결혼한 두 사람은 1978년 찰스 임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7년간 하루 13시간, 주 7일을 함께 일하며 전설적인 디자인 피스들을 쏟아냈다.

임스 부부는 에로 사리넨과 설계한 의자에서 처음으로 열성형합판(Plywood) 기술을 도입했고, 통상적인 일자 각목이 아닌 열성형합판을 이용해 신체 곡선에 꼭 맞는 부목을 제작해 호평받았다. 이후 부부는 실력이 소문나 미 해군의 부목 공급권을 따낸다. 해군에 10만 개의 부목을 공급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은 이들은 자신들의 사무소 임스 오피스를 열었다.

12인치, 15인치 동축 유닛을 장착한 E4. 지난 10년간 해외 옥션 낙찰가가 2배 이상 올랐다. [사진 eames office]

12인치, 15인치 동축 유닛을 장착한 E4. 지난 10년간 해외 옥션 낙찰가가 2배 이상 올랐다. [사진 eames office]

임스 오피스의 첫 히트작은 LCW다. 부목에 사용했던 열성형합판 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아름다운 의자였다. 신기술을 열망한 임스 부부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소재인 유리 섬유 강화 플라스틱(FRP)으로 이어 간다. 1948년 발표한 의자 라 셰즈(La Chaise)는 유리 섬유를 도입해 열성형합판이 도달할 수 없는 형태를 완성했다. 라 셰즈는 감탄을 자아낼만큼 아름다웠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 양산에 이르지 못했다. (1990년대가 되서야 판매를 시작했다.) 누구나 꿈꿀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의자를 원했던 임스 부부는 절치부심해 1950년 다시 한 번 FRP를 이용한 몰디드 암체어(Molded Plastic Chairs) RAR를 발표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흔히 임스 체어라 불리는 의자가 바로 이 시리즈다.

임스 부부의 선진적 행보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들의 열성형합판 기술은 덴마크의 아르네 야콥슨에게 영감을 제공했고 이후 앤트, 세븐, 그랑프리 체어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었다. 플라스틱 몰드 기술도 대중화되어 이후 베르너 팬톤의 팬톤 체어 등에 널리 쓰였다.

한편 1950년대 경제 호황이 찾아오며 컬러 TV, 홈 오디오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LP(Long Play) 신기술이 탄생해 한 면에 30분 이상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앨범’의 시대도 열렸다. 어쿠스틱 리서치(AR)의 애드가 빌처가 개발한 어쿠스틱 서스펜션 기술 덕분에 홈 오디오의 스피커는 거대한 궤짝에서 책장에 넣을 수 있는 북쉘프 사이즈로 작아졌다. 자연히 가격이 저렴해졌고, 오디오는 대중화의 물결을 탔다. 이제 집 안에서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음악과 영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라운지 체어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디터 람스, 임스 부부의 스피커 모방

임스 부부. [사진 eames office]

임스 부부. [사진 eames office]

시대의 요구에 가만있을 임스 부부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10여년 전 마릴린 먼로 주연의 ‘뜨거운 것이 좋아’로 유명한 감독 빌리 와일더를 위해 제작한 릴렉스 체어 ‘임스 라운지 체어’가 있었다. 임스 부부의 장기인 열성형합판에 푹신한 가죽 쿠션을 더하고 발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오토만까지 갖춘, 영화나 음악 감상용으로 최고의 의자였다. 부부는 이 의자를 10여년 동안 발매하지 않고 있었는데, 가정용 오디오 시장이 무르익은 1956년 TV 쇼를 통해 제품을 론칭하기로 결정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임스 부부는 음악과 영상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평생 동안 100여편의 단편 영화를 제작했는데, ‘고스트 바스터즈’의 음악 감독을 맡은 엘버 번스타인에게 영화음악을 전담시킬 정도였다. 부부는 사람들이 임스 라운지 체어에 앉아 그들이 디자인한 오디오로 음악을 감상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꿈꿨다. 그런데 마침 그들의 친구 버트 베를란트, 버나드 D. 컬린이 스피커 제조사 스테판 트루소닉(Stephens Trusonics)을 인수했다. 스테판 트루소닉은 웨스턴 일렉트릭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스테판 트루소닉이 1938년 창업한 스피커 제조사로, 탁월한 음향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라이벌 JBL이 1954년 하츠필드 스피커를 발표하며 시장을 석권해 버리자 트루소닉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임스 부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임스 부부 또한 그들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오디오를 원하던 터였다. 바로 설계에 착수해 1956년 스테판 트루소닉 브랜드로 4종의 스피커를 발표했다. 3웨이 스피커 E3, 2웨이 스피커 E1, E2, 동축 스피커 E4가 그것이다. 4종 모두 탁월한 디자인을 자랑하며 단번에 경쟁자를 압도했다. 동시대 임스 부부의 스피커처럼 디자인과 소리 모두가 매혹적인 스피커는 없었다. 가장 임스다운 스피커로 꼽히는 E1S는 라운지 체어에 쓴 베이스를 그대로 써서 지금도 임스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E4는 가장 콤팩트한 모델이지만 사각형 인클로저에 유선형의 열성형 합판을 덧댄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임스 부부의 스피커는 그들의 목표대로 오디오 시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발매 직후 트루소닉이 경영난에 처하며 그들의 스피커도 짧은 시간 소량만 생산되고 사라지고 말았다. 국내에는 임스 가구로 빈티지 가구에 입문한 이들이 많아 팬덤이 두텁지만 임스 스피커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레어템에 속한다. 워낙 극소량만 생산된데다 임스의 극성 팬들이 소장할 뿐 판매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일본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높아 매물이 나왔다 싶으면 금세 판매돼 사라진다. 아름다운 비율을 자랑하는 E4는 최근 인기가 점점 높아져 가격이 급격히 오르는 추세다.

임스 부부의 스피커는 가구 디자이너가 오디오에 참여해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사례다. 이를 지켜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필립스의 오디오 디자인에 참여했다. 임스 부부가 스테판 트루소닉의 스피커를 디자인한다는 소문을 들은 JBL은 산업 디자이너 아놀드 울프를 찾아 신제품 디자인의 전권을 맡겼고 그는 오디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 파라곤을 완성했다. 임스 부부를 존경한 디자이너 디터 람스도 그들을 좇아 브라운과 비초에 제품에 신소재를 적극 도입했다. 심지어 그가 1959년 설계한 스피커 L2는 임스 부부의 스피커 E1L을 그대로 모방했다. 임스 부부의 오디오 디자인은 대서양 건너 독일의 디터 람스에게, 그리고 덴마크의 뱅앤올룹슨으로 이어졌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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