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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얼리어답터' 고종, 집 몇 채 값 축음기 사서 음악 감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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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26면

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1900년대 초 국내에 유통된 에디슨사의 스탠다드 축음기 모델C. [중앙포토]

1900년대 초 국내에 유통된 에디슨사의 스탠다드 축음기 모델C. [중앙포토]

최초의 오디오는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포노그래프(Phonograph, 축음기)다. 2년 후 에디슨은 백열전구 발명에 성공,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전구 사업에 주력하면서 포노그래프에는 무신경해졌다. 그가 포노그래프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독일 이민자 에밀 베를리너가 포노그래프의 단점을 개선한 그라모폰(Gramophone)을 내놓고나서다. 이후 두 사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오디오는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며 역사를 써내려갔다.

한국은 흥미롭게도 발명 후 3년도 채 되지 않아 축음기를 접했다.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오디오 사용자는 조선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이다.

‘십년감수’ 사자성어 일화로 전해져

우리가 누리는 현대 기술 대부분은 19세기 말에 집중적으로 탄생했다.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했고, 토마스 에디슨이 1877년 축음기, 1879년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1888년 카를 벤츠가 가솔린 내연 기관을 발명해 자동차가 탄생했고, 1889년 에디슨이 영사기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하며 시네마 시대가 열렸다.

수백 년간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은 조선이었지만 고종은 달랐다. 그는 자주·자강의 근대적 주권 국가를 열망하며 개방을 시도했다. 첫 번째 찾아온 기회는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고종은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라 평가하며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듬해 미국으로부터 초대 미국 전권 공사 푸트가 부임하자 이에 보답하는 외교 사절단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중심으로 홍영식·서광범·유길준을 포함한 11인이 1883년 7월 15일 제물포를 출발, 요코하마를 경유해 40여 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조선 최초로 서구에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8일간 기차로 이동한 이들은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났다. 뉴욕 피프스 애비뉴 호텔에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자 보빙사 일원은 예의를 갖추어 큰절로 답했고, 이 이국적인 광경은 미국 신문에 삽화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1883년 뉴욕은 미국 전역으로 뻗어나간 철도를 이용해 어디든 며칠 내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전화로 서로 연락이 가능했다. 전구가 환히 밝혀주는 불야성에서 축음기로 음악을 감상하는 첨단 도시였다. 여기서 보빙사는 40여 일간 체류하며 미국의 군사·정치·산업·문화를 빠짐없이 경험했다.

귀국한 보빙사 일행은 고종에게 그들이 체득한 신식 문물을 소상히 전달했고, 고종은 이들의 의견을 경청해 최신 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시작은 전구였다. 바로 미국 에디슨 전등 회사에 발주를 넣어 엔지니어 윌리엄 맥케이가 조선에 파견되었고, 3년 후인 1887년 경복궁 향원정에 백열등 750개가 켜졌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단 8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의 전구 도입은 동양 최초로, 일본보다 2년이 빨랐다.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오디오 사용자로 꼽히는 고종 황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공식적인 한국 최초의 오디오 사용자로 꼽히는 고종 황제.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전구에 이어 전차가 들어섰다. 미국과의 합작 회사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고 1899년 서대문에서 동대문을 잇는 전차가 개통됐다. 교토에 이어 아시아 두 번째 전차 도입으로, 도쿄보다 3년이 빨랐다. 영화는 흥미롭게도 전차를 통해 들어왔다. 초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전차가 인사 사고, 반미 감정이 더해지면서 ‘전차 안 타기 운동’이 벌어지자 회사 대표 콜브란이 이를 잠재우기 위해 동대문 전차고에서 영화를 상영, 환심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곳은 이후 상설 극장 ‘광무대’로 운영되어 단성사의 모태가 된다.

오디오는 서양 문물인 전구와 전차가 조선에 안착하는 배경 아래 수용됐다. 조선에 오디오가 전래된 첫번째 기록은 1880년 대동강을 찾은 프랑스 선교사가 축음기를 가져와 평안 감사에게 들려준 것이다. 이후 조선을 방문한 수많은 외국인이 축음기를 가져와 조선인들을 현혹했다. 당시 서양인들이 ‘귀신이 소리를 내는 기기’를 가지고 다닌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조선인이 축음기를 구매했다는 기록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당시 축음기의 가격은 집 몇 채 값에 이를 정도로 고가였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호기롭게 축음기를 덜컥 구입할 수 있는 이는 ‘조선의 얼리어답터’ 고종뿐이었다.

고종이 처음 축음기를 접한 시기에 대해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미국 초대 공사 호러스 알렌을 통해 1880년대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일본에도 축음기가 전해져 1889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정부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축음기 시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다만 고종이 축음기를 처음 접했던 일화는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종은 축음기를 시연하기 위해 당대 명창으로 꼽히는 박춘재를 불러 그의 노래를 축음기에 녹음해 이를 감상했다. 녹음된 음에 놀란 고종은 “기계에 기운을 빼앗겼으니 춘재의 수명이 10년은 감해졌도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탄생한 사자성어가 십년감수(十年減壽)다.

이후 축음기에 매료된 고종은 덕수궁에 서양식 건물 정관헌(靜觀軒)을 짓고 매일 가배(커피)를 마시며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서양 음악을 감상했다. 지금으로 치면 음악과 커피를 즐기는 전용 오디오 룸을 마련한 셈이다. 고종은 여름휴가 기간 내내 음악을 들을 정도로 축음기를 애용했고 고종이 축음기를 사랑하는 것을 안 외국인들이 환심을 사기 위해 고종에게 최신 축음기를 선물하곤 했다.

국내 최초의 오디오 금성사 A-501. [사진 LG전자]

국내 최초의 오디오 금성사 A-501. [사진 LG전자]

고종의 축음기 사랑이 널리 퍼지며 한국에도 자연스레 축음기가 안착했다. 하지만 비싼 축음기 가격은 개인이 선뜻 구매하기 버거웠다. 대신 돈을 내면 축음기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길거리 유성기 집’이 성행했다. 이후 등장하는 음악 감상실, 음악다방의 효시다. 축음기 수요가 늘자 1899년 축음기 수입상이자 한곡 최초의 오디오 상점 개리양행이 정동에 오픈했다.

이 시기 서울은 전차로 출퇴근하며 밤에는 가로등이 거리를 밝혔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길거리 유성기 집, 영화를 볼 수 있는 광무대, 가배를 즐길 수 있는 카페가 곳곳에 있는 근대적 도시로 발돋움했다. 최신 문물의 수용 시기 만큼은 일본에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축음기가 보급되며 자연스레 음반 시장도 형성됐다. 한국 음악을 듣고자 하는 수요는 점점 커졌지만 한국엔 레코딩 시설이 전무했다. 이를 노린 것이 일본 축음기 기업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되었고, 축음기 기업도 이때 들어왔다.

축음기를 수용한 시기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개항이 30년 빨랐던 일본은 경제력을 가진 소비자층이 두터워 축음기가 빠르게 보급됐다. 1899년 도쿄 아사쿠사에 창업한 축음기 상점 삼광당은 수년 만에 일본 내 24개 지점을 갖출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들은 1905년 한국에도 진출했다. 한국 시장 장악을 위해 무엇보다 한국 노래 음반이 필요하다 판단했지만 정작 그들도 레코딩 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1907년 한국 최초 유성기 음반 발매

삼광당은 미국 콜롬비아 레코드사와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했다. 콜롬비아 엔지니어가 일본 음반 레코딩을 위해 오사카에 머무를 동안 한국 음악인들을 데려가 레코딩에 성공했다. 이 음반은 1907년 1월 삼광당을 통해 국내에 발매된 한국 최초의 유성기 음반이다. 콜롬비아 레코드의 경쟁사 빅터는 이에 뒤질세라 6개월 후 엔지니어 윌리엄 가이스버그를 서울로 파견해  음반 101매를 녹음했다. 이후 삼광당은 일본, 한국 양쪽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1910년 미국인이 운영하던 혼상회와 합병해 사명을 ‘일본 축음기 상회’로 변경했다. 이 기업이 오디오 기업 데논(Denon)의 모태다.

이후 한국 오디오와 음반 시장은 일본 기업이 지배했다. 음반은 한국인 소유 음반사들이 히트작을 내놓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한국 오디오 기업의 출현은 전무했다. 일본인들이 오디오 기술을 독점했을 뿐만 아니라 창업의 기반이 되는 대출을 한국인에게 엄격하게 금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 기업이 떠나자 오디오 시장은 미군을 통해 흘러나온 제품들이 채웠다. 종전 후에는 때마침 전성기를 맞이한 일본산 오디오가 밀수로 유입되며 다시금 한국 시장을 장악했다.

최초의 국산 오디오로 1959년 금성사(현 LG전자)가 발매한 라디오 A-501이 꼽힌다. 이전에 국내 기업이 판매한 라디오는 수입이 금지됐던 일본 라디오의 부품을 수입해 국내에서 재조립한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금성사는 엔지니어 김해수의 주도로 국산 부품 70% 이상을 사용해 완성했다. 발매 첫해 불과 87대만 판매된 A-501은 1961년 일제 밀수품 강력 단속, 1962년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등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3년만에 13만 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히트했다. 라디오 성공에 힘입은 금성사는 TV, 냉장고로 라인업을 확대하며 지금의 LG전자로 성장했다. 라디오 A-501은 국내 최초의 오디오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현준 오디오 평론가. 유튜브 채널 ‘하피TV’와 오디오 컨설팅 기업 하이엔드오디오를 운영한다. 145년 오디오 역사서 『오디오·라이프·디자인』을 번역했다. 한국 오디오 문화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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