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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보다 물질 더 욕망, 초저출산·유령 영아 문제 생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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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28면

러브에이징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해 대양 저편의 대륙과 문명권을 연결해 준 대항해시대(The Age of Discovery)가 열리면서 인류는 지구촌 전체를 서술하는 세계사를 쓰기 시작했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인들은 발달한 항해술과 조선업을 토대로 초대형 범선을 타고 대규모 해양 탐험에 나섰다. 바다를 정복하려는 탐험가들이 직면한 가장 큰 난관은 거친 바다의 풍랑도, 배의 침몰도 아닌 선원들에게 집단으로 발생하는 괴혈병이었다. 비타민C가 석 달 이상 결핍돼 잇몸, 근육, 피하점막 등에 출혈이 생기고 시력도 나빠지며 혈뇨, 혈변 등으로 사망하는 병이다. 비타민C는 결합 조직을 구성하는 콜라겐 생성에 필수 요소라 부족하면 신체 어디에서건 출혈이 생길 수 있다.

홀로 무인도 살면 욕망 대상 찾기 어려워

실제로 태평양처럼 거대한 망망대해를 몇 달씩 항해할 때는 선원의 절반 이상이 괴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는 허다했고 75%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대항해시대에 괴혈병으로 사망한 선원을 200만명 정도로 추산한다. 당시에도 과일이나 야채를 섭취하면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지속해서 공급하기가 어려웠다. 주스 형태는 배 안에서 금방 상했기 때문이다.

물질 욕망

물질 욕망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다. 그는 배에서 장기간 보관한 상태로 섭취할 수 있는 비타민C 공급원으로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선택해 3000㎏ 넘게 배에 실어 선원들에게 권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선원들이 맛이 없다며 강하게 저항하면서 먹기를 거부했다. 고민 끝에 쿡 선장은 묘안을 생각해냈다. 절인 양배추를 장교들에게만 제공했던 것이다. 장교들이 섭취하는 걸 본 일반 선원들은 이내 절인 양배추를 달라고 선장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캡틴 쿡은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작동하는 모방과 경쟁이라는 욕망의 심리를 이용해 역사상 최초로 괴혈병 사망자 없이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나만의 취향과 특성이 강조된다. 개인의 도덕적 가치나 철학, 사회적인 시각과 이념, 희망과 욕망 등은 존중의 대상이다. 특이한 취미나 불합리한 소비도 개성이나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 한국인들의 개성과 욕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현대인의 욕망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내가(욕망의 주체) 무언가를(욕망의 대상) 갈망하는 이유는 내가 동경하는 사람 혹은 경쟁자가(욕망 매개자)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다.

예컨대 캡틴 쿡의 선원들도(주체) 처음에는 절인 양배추를 싫어했지만 그들이 선망하는 장교들이(매개자) 먹는 모습을 보자 그때부터 양배추를(대상) 욕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명인을 동경하는 대중들이 그들의 소지품이나 패션을 마치 본인의 취향인 양 맹목적으로 구입하고 유행시키는 현상과 맥을 같이 한다.

서구는 약자 보호·불의 대응 등 가치 추구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도 대량 생산과 소비가 일상화된 현대인의 욕망은 타인에 의해 주입된 것이며 타인의 욕망이 없다면 나의 욕망도 없다고 강조한다. 실로 무인도에 홀로 생존하는 사람에게서 욕망이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구밀도 높은 단일민족 국가(한민족 96%)인 한국에서 욕망의 대상에 대한 사회문화적 쏠림 현상이 심한 건 당연해 보인다. 특히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황금만능주의가 심화하면서 사회적 가치는 물질로 환산되고 모방과 경쟁의 대상도 단순해졌다. 중산층 기준만 보더라도 한국은 30평 아파트, 월수입 500만원, 2000cc 중형차, 예금 1억, 연 1회 해외여행 등 모두 형이하학적이다. 경쟁자인 중산층 친구를 모방할 때 욕망할 대상과 기준이 명확하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외국어, 운동, 악기 연주, 특별한 요리, 약자를 돕는 봉사 활동 등 형이상학적 요소를 실천해야 중산층에 속한다. 중산층 친구를 모방하려면 다양하고 복잡한 노력이 필요하다. 영국도 중산층에게 정정당당한 승부(fair play), 개인적 신념, 독선적이지 않음, 불법과 불의에 대응, 약자 보호 등의 자질을 요구한다. 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조차 중산층은 사회적 약자 돕기, 부정과 불법에 저항, 떳떳한 자기주장, 비평지 구독 등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이처럼 한국과 구미 선진국은 사회 구성원들이 욕망하는 대상이 확연하게 차이 난다. 결과는 2023년 한국 사회가 봉착한 세계 1위 초저출산,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살률 1위, 유아 교육 광풍, 전세 사기, 영끌 투자와 투기, 수천 명의 유령 영아, 낮은 행복 지수 등의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욕망의 본질은 필요한 욕구나 요구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심리 상태다. 욕망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욕망 덕분에 인류는 야만의 시대를 넘어 문명사회를 열고 문화를 꽃피우며 산다. 진(眞)·선(善)·미(美)를 모방하려는 욕망을 품은 사회는 휴머니즘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산적한 문제는 천문학적 예산 투자 대신 지도층의 욕망부터 형이하학적 물질에서 형이상학적 가치로 변해야 해결될 것이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선원들을 죽음에서 구한 캡틴 쿡이 보여줬던 지혜로운 지도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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