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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10시간이 장편소설급" 피아니스트들 사로잡은 32곡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시작한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 이번 서울 공연이 꼭 60번째 완주다.[사진 빈체로]

지난달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시작한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 이번 서울 공연이 꼭 60번째 완주다.[사진 빈체로]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시간만 약 575분. 그러니까 9시간 35분이다. 연주곡은 총 32곡. 한 곡당 2~4개 악장으로 돼 모두 101개 악장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이어가는 피아니스트들 #145년 전 한스폰뷜로가 시작, 21세기에도 계속돼 #오스트리아의 부흐빈더 서울에서 60번째 전곡연주 중

피아니스트에게 거대한 산맥 넘기와 같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의 규모다.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인 루돌프 부흐빈더(77)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난달 28일 이 노정을 시작했다. 소나타 1번으로 시작해 ‘월광’(14번) 소나타로 끝난 이 날 공연에서 그는 인위적 해석은 빼고 명확하게 파악한 소나타를 들려줬다. 악보 없이 모든 곡을 외워서 연주하는 노장은 이달 9일까지 총 7회 연주에서 32곡을 완주한다. 공연마다 있는 앙코르 연주까지 더하면 10시간을 가볍게 넘는 무대다.

부흐빈더는 이번 한국 연주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꼭 60번째 무대에 올렸다. 30대 후반이던 1982년 첫 전곡 연주를 했고 40년 넘게 이 32곡 세트를 파고들었다. 그는 내한 공연을 앞둔 기자간담회에서 “혁명적인 음악이다. 매번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며 긴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거대한 작품은 다른 피아니스트에게도 도전 대상이다. 역사상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32개의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1878년 한스 폰 뷜로가 시작해 전곡 연주의 역사만 140년이 넘는다. 20세기 피아니스트들이 바통을 받았다. 아르투르 슈나벨의 단호함, 빌헬름 박하우스의 힘 있는 연주가 전곡 녹음의 맥을 이어갔다. 빌헬름 켐프는 노래하는 베토벤을 선보이며 후배 연주자들에게 또 다른 모범을 마련했다. 이어 에밀 길렐스의 타악기 연주와 같은 표현은 극도로 정확한 베토벤 소나타의 기준이 됐다. 또 프리드리히 굴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알프레드 브렌델, 그리고 전곡을 5번 녹음한 다니엘 바렌보임의 스토리 짙은 해석에 이르기까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은 끊임없이 불려 나왔다.

한국 피아니스트들의 도전사도 만만치 않다. 피아니스트 이경숙이 1987~98년 8번에 나눠 완주했고 최희연은 4년 동안 전곡을 연주했다. 이연화는 2007년 전곡 음반을 선보였다. 같은 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공연도 화제였다.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 8회 동안 유료 관객 점유율 90%를 기록했고, 8회 모두 참석한 청중이 600명이었다. 백건우는 2017년에도 다시 한번 전곡을 연주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24세이던 2012년, 손민수는 2017~20년 전체 소나타를 연주했다.

2007년 12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독주회 [사진 크레디아]

2007년 12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백건우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독주회 [사진 크레디아]

피아니스트들은 소나타를 왜 한꺼번에 연주하려 할까. 베토벤 소나타에는 따로 떼어 연주해도 인기 있는 작품이 많다. ‘비창’ ‘월광’ '템페스트' ‘열정’으로 제목 붙은 소나타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들은 특별히 전곡의 여정에 몰두한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두 번째 전곡 연주를 시작하면서 “32곡이 모두 너무 다른 것이 매력이다. 변화를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매력적인데 모두 완벽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또 “32곡 전체를 보면 하나의 장편 소설과 같은 드라마가 나온다. 전체를 들으면 드라마가 확실히 느껴진다”고 했다.

베토벤은 전 생애에 걸쳐 피아노 소나타를 썼다. 정식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세 곡까지 치면 13세부터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52세까지다. 평생 놓지 않고 작곡했던 장르는 피아노 소나타가 유일하다. 영국의 음악평론가 존 수셰는 팟캐스트에서 “피아노가 베토벤의 목소리였다. 반드시 표현해야 할 생각은 피아노로 전달했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피아노 소나타들을 따라가면 베토벤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다. 청력 문제에 절망해 유서를 쓴 뒤에는 단조로 시작해 단조로 끝나는 ‘열정’(23번) 소나타를 작곡했다. 동생이 죽은 뒤 조카의 양육권을 두고 지난한 법정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는 승리 선언처럼 화음을 내던지는 ‘함머클라비어’(29번) 소나타를 내놨다. 몸이 쇠한 후 쓴 마지막 32번 소나타는 보통 소나타보다 형식이 축소된 두 개 악장이다. 이 곡에 대한 “목적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너머로는 더는 나아갈 수 없다”(토마스 만)는 해석은 베토벤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32개의 작품은 베토벤의 생애뿐 아니라 피아노의 발전사도 품고 있다. 19세기 피아노 발전은 베토벤에게 영향을 줬고, 악기 제작자들은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스타였던 베토벤의 조언을 받았다. 풍성한 화음 등의 여러 효과를 위해 베토벤은 독일·프랑스·영국 제작자의 악기로 갈아타며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나갔다. 특히 소리의 크기와 부드러움 면에서 만족스러워했던 프랑스-영국식 악기인 에라르 피아노의 영향은 21번 소나타(‘발트슈타인’), 23번(‘열정’)에 반영돼 있다. 후기 작품들은 피아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브로드우드 피아노와 관련이 보인다.

예술철학 박사인 장유라는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에서 철학적 의미를 발견했다. 그는 부흐빈더 공연의 프로그램 북에서 “(작곡한 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우리에게 변함없는 자극과 원동력”이라며 “진지하고 치열하게 진리의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루돌프 부흐빈더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네 번의 연주를 마쳤고, 7~9일 남은 13곡을 연주한다. 평일은 오후 7시 30분, 주말은 오후 5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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