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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쌍둥이표 칼 메이커 독 츠빌링 헹켈사 (미·일·유럽의 유명기업 현지취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증조 할머니가 쓰던 칼을 대물림해 쓸 수 있다.」
유럽의 어느 회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게 마련이지만 「쌍둥이 칼」로 유명한 츠빌링 헹켈사처럼 오랜 명품의 역사를 지닌 기업은 드물다.
우직스럽게 2백59년 동안 칼만을 만들어온 것이다.
기업의 역사가 오랠 뿐만 아니라 대를 물려 쓸 만큼 칼이 잘 들고 견고하다는 게 그들의 자랑이다.
헹켈사는 쌍둥이가 손을 맞잡고 걷는 독특한 로고가 전 세계에 알려져 있지만 기업규모는 명성에 비해 너무나 작다. 종업원 6백 여명 규모의 중소기업에 불과한 것이다.
헹켈의 칼이 명품이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이 회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종업원 6백여명>
이 회사의 역사 속에 오늘의 쌍둥이 칼을 만든 장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헹켈사는 네덜란드와의 국경이 멀지 않은 독일 서북부지역의 졸링겐시에 자리잡고 있다.
졸링겐 시 인근에는 이 도시를 주방용품 생산도시로 만든 부퍼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졸링겐은 이미 수 백년 전부터 대장간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부퍼강이 철을 강하게 하는 담금질에 필요한 물을 풍부하게 공급해줬기 때문이다. 전국의 대장꾼들이 물을 찾아 이곳에 몰려들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인구 16만 명 규모의 졸링겐에는 아직 3백여개의 크고 작은 주방용품 회사가 자리잡고있다. 이들 중에는 2∼3명이 일하는 가내공업 형태의 가족기업이 적지 않다.
헹켈사는 이들 수많은 전통기업의 하나이지만 「얼음 담금질」이라는 특수한 공법을 개발, 경쟁자를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명품 중소기업으로 우뚝 올라선 것이다.
헹켈의 창립자는 요한 피터 헹켈이라는 대장꾼이었다. 그는 1731년 졸링겐에 칼 공장을 세우고 지방 교회에 헹켈 상표를 등록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특허청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실권을 쥐고있던 교회에 등록한 것이다.
헹켈이 창립될 당시 독일은 봉건 영주들끼리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시대였다.
기사들은 무장을 해야 했고 전투용 칼을 만드는 것은 큰 사업이었다. 헹켈도 처음에는 이 지역의 봉건 영주인 그라프 폰 베르그 밑에서 군인들을 위한 단검을 주로 만들었다.
그랬던 것이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주방용 칼과 가위를 만들기 시작했다. 1853년에는 산업혁명과 함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춰 오늘의 쌍둥이 칼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가내공업 형태의 군수산업에서 출발했다가 민수용으로 방향을 돌렸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신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변신 속에서도 장인정신은 줄곧 지켜왔다. 창업자뿐만 아니라 종업원의 장인정신이 돋보인다.

<후회는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헹켈사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평생 공장에서 칼과 가위만을 만들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이 회사에서 33년 간 근무해온 아돌프 플라이슈만 씨(52)는 "한 회사에서만 근무한데 대해 후회 없느냐"는 물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3년 과정의 직업학교를 나온 뒤 1957년 헹켈사에 입사했으며 70년 아우스빌 등 마이스터 자격을 따낸 대장꾼이다.
아우스빌둥 (또는 위붕) 마이스터란 자격시험을 치러 따내는 일반 마이스터와는 달리 회사가 숙련된 「솜씨」를 인정해주는 명예 마이스터 제도.
장인정신이 발달한 독일만의 독특한 제도로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통독을 할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이 막강해진 것도 결국 이 같은 장인정신 덕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듯하다.
"헹켈에는 마이스터가 20∼30명, 위붕 마이스터가 역시 비슷한 숫자인데 위붕 마이스터가 단연 첫손에 꼽히죠." 헹켈사의 매니저 잘몬씨는 "위붕 마이스터가 생산과정에서 더 중요한 업무를 맡고있다"고 말하고 양자를 섞어놓아야 제품이 완벽해진다고 밝혔다.
이론적인 면은 마이스터가 낫지만 실제로 제품을 만들거나 잘못된 부분을 짚어내는데는 위붕 마이스터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3세 때부터 37년 간 칼만을 만들어 왔다는 테오 쉬람 씨(50)도 "4년 전 회사에서 위붕 마이스터 자격을 얻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같은 장인정신은 기술개발 정신으로 이어진다.
헹켈은 1851년 영국 런던 세계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획득, 최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데 이어 1879년에는 제정러시아 니콜라이 황제 때 러시아 장교들을 위해 검을 만들어 납품하기도 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의 주방용품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등 유럽 대륙 내에서뿐만 아니라 칼과 가위의 품질에서는 전 세계에서 「최고」를 인정받았다.

<전 세계 최고 인정>
그러나 헹켈이 더욱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51년 얼음 담금질 가공법인 「프리오두어」 제조공정을 개발, 세계특허를 얻으면서부터다.
프리오두어는 라틴어로 차갑고 강하게 한다는 뜻인데 철을 섭씨 1천60∼1천80도로 뜨겁게 달구다 영하 70도로 급속 냉각시킴으로써 더욱 강하게 한다는 공법이다.
이밖에도 칼과 가위의 열 단조 과정에서 빨갛게 단 쇠를 액체 소금용액에 담가 완제품의 부식을 방지하는 소금 공법도 개발했다.
헹켈의 제품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히는 것은 제품에 별 네 개가 그려져 있는 「스타 시리즈」다.
스타 시리즈는 수공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칼날 (스테인리스)과 칼자루 부분(탄소강)을 레이저로 용접함으로써 이음부분이 없도록 했다.
이음부분이 있으면 손으로 칼을 잡을 때 불쾌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손잡이의 각진 부분을 없애 하루송일 잡아도 손이 편하다는 장점을 자랑하고 있다.
칼의 디자인도 주먹구구식으로 한 게 아니라 자체 연구소의 기술진과 디자인 전문회사인 부세사가 공동으로 했다.
헹켈의 연구진(12명)은 로봇을 직접 제작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따라 개조해 쓸 수 있는 수준이다.
헹켈의 쌍둥이 칼을 명품으로 만드는 데는 츠빌링(쌍둥이)의 로고가 큰 몫을 했다.
헹켈사는 1731년 설립됐지만 40년 간 회사이름 없이 쌍둥이 로고만 사용했고 1771년에야 회사이름을 요한·아브람 헹켈로 정했다.
창립자가 쌍둥이가 아닌데도 쌍둥이 심벌을 사용한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서라는게 회사측의 설명이다.
붉은 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쌍둥이 로고는 1970년께부터 사용됐다.
그 이전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로고의 디자인이 바뀌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걷는 「드릴링」을 쓴 적도 있다. 헹켈은 마케팅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갖고 있다.

<한국에도 하청 줘>
다른 회사의 제품과 섞어놓지 않고 헹켈의 제품만을 파는 「전문점」이 그것이다. 이는 헹켈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종류가 1천2백여 종으로 다양화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전문점은 독일에만 18개가 있다.
헹켈은 또 제품 차별화 전략을 쓰고 있다. 스타 시리즈 등 고급품은 졸링겐의 공장에서 직접 만들고 비교적 값이 싼 제품들은 외국에서 하청 생산을 통해 들여온다. 말하자면 브랜드를 파는 셈이다.
헹켈측은 한국에서도 주문 생산하고 있다.
헹켈의 수출비중은 제품에 따라 55∼80%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헹켈사가 이제는 헹켈 가문의 소유가 아니라는 점이다.
창립자의 11대 손인 요한 알베르트 헹켈씨가 지난 70년 독일의 금융재벌인 베어한 그룹에 지분을 모두 팔아 넘긴 것이다.
노사분규는 20여년 전 이틀 간 조업을 중단했던 것이 전부다. 사회보장도 잘돼있는 데다 종업원이 대부분 졸링겐 지역 주민이어서 공장의 분위기가 무척 가족적인 것이 노사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헹켈은 또 2백59년 간 공장을 옮긴 적이 없다. 회사건물도 2차 대전 때 파괴된 낡은 벽돌건물 (5층)을 일부 수리해 그대로 쓰고 있다.
헹켈의 「한 우물 파기」는 「문어발」확장의 비난을 받고있는 우리 대기업들이 기업의 전문화라는 측면에서 되새겨볼 부문이 아닌가 싶다. 【글 길진현기자 사진 임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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