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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천년 한 오지 마을서 재현|일 남향 촌 백제 관 준공식에 다녀와서 (상)…정연희 기행 「남향 촌의 오사라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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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달 24일 오전 10시 일본 궁기현 남향 촌에서는 일본문화의 뿌리로 평가되는 백제시대의 각종 문화유적을 전시하게될 백제 관 준공식이 있었다. 준공식과 기념행사 등에 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던 소설가 정연희 씨의 참관기를 두 번에 나누어 소개한다. 제목중의 「오사라바」를 일본 현지 인들은 「사랑하다」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랑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절실한 「살아봐」 「살아서 다시 보자」는 백제 유민들의 절규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 까고 필자는 해석하고 있다. 【편집자 주】
남향 촌.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있는 고향의 이름 같기만 했다. 가슴속 깊은 곳 한 자락에서 그리움으로 따뜻하게 숨쉬고 있는 듯한 이름이 아닌가.
그러나 그곳은 김포에서 일본 구주의 복강까지 한시간, 후쿠오카에서 다시 비행기로 40분을 날아간 궁기 현에서 다시 육로로 2백여 리 산 속으로 더듬어 들어간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을이었다.
그 남향 촌에 백제리라는 이름을 불이고 그곳에 백제 관을 세워 준공식 겸 그 마을 전래의 제의를 지낸 것은 지난 11월24일의 일이었다.
나라 안이나 나라 밖이나 온 세상이 눈앞의 몇 가지 이익을 두고 피차가 숨이 턱에 차 있는 판국에 일본 남녘 땅, 그것도 깊고 깊은 산골 마을에 백제 관 하나가 세워졌다해서 발걸음을 멈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만은 도대체 그 「세상 끝」같은 산중에서 백제라는 뻐젓한 이름이 어떻게 해서 들고 일어섰으며 백제 관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세워졌는지 궁금하기 이를 바 없었다.

<지난달 24일 제사 지내>
종려나무·야자 등 마음껏 키가 자란 열대 식물이 남국의 정취를 진하게 풍기고 있는 궁기현을 벗어나자 단선의 자동차 길은 오른편으로 태평양을 끼고 왼편으로는 제대로 된 산세를 바라보며 계속 이어졌다. 마을은 심심찮게 이어져 있었으나 한적하기 이를 바 없어 적적할 정도였고 그렇게 이어지던 길이 일향이라는 곳에서 급하게 좌회전하면서부터는 곧장 산길이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잘 생긴 산들이 어깨를 겹치고 있었다. 잘 가꾸어진 삼목이 울울한 것이 다를 뿐, 언뜻 강원도 쪽과 외설악 골짜기를 연상케 하는 산길이었다. 골짜기를 이룬 왼편으로 물길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산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목을 길게 늘여 보아도 좀처럼 그럴싸한 마을을 만날 수가 없어 지칠 때쯤 되었는데 먹빛도 선명하게 「백제の리」라고 쓰인 큼직한 입 간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어서 마을 어귀의 돌장승 한 쌍이 아는척했다. 경오년 8월 백제고도 부여인 운정 김종필 기증의 장승이었다. 남향 촌 백제의 숨결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까…. 한유한 생각에 잠겨 마을입구에 들어섰을 때 남향 촌은 전혀 예상 밖의 장면을 연출하여 신선한 충격으로 우리 일행을 사로잡았다.
길 양옆을 가득 메운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와 일장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었다. 아기들·어른·젊은이·노인·화복으로 맘껏 치장한 꽃 같은 처녀들과 허리가 아주 꼬부라진 노파까지 이날을 위하여 평생 아끼고 모아두었던 웃음을 맘껏 꽃피우듯 그렇게 웃음꽃을 피우고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무엇에 좇기는 일도 없고, 무엇을 헛되이 좇아가는 일도 없이 하늘을 하늘로 알고, 땅을 땅으로 알며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아 온 것만큼 늙은 정직한 얼굴과 그 정직함 속에서 한눈파는 일없이 자라고 있는 산정기가 풋풋하게 품기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투박한 손을 잡으며 산바람에 익은 아이들의 볼과 별빛으로 영근 총총한 눈을 마주보며 사람다운 사람을 오래 간 만에 만나는 감격으로 하여 목이 메었다.
나부끼는 깃발 뒤로는 신문신사 (みかど)를 감싸고 있는 남목 고목이 천년 숨결을 가다듬고 있었고, 그 울울한 고목 그늘에 봉황이 활개치듯 눈부신 단청의 백제 관이 청청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돌장승도>
옛 왕궁을 재현하여 현재 부여의 국립박물관이 되어있는 건물 중 객사를 그대로 본뜬 백제 관은 설계는 물론, 기와를 한국에서 실어갔고 단청을 위하여 몇 사람의 전문가가 끝까지 손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설명이다.
사람이 그지없이 좋아 보이는 촌장 전원정인 씨의 지휘아래 여러 날을 두고 남향 촌을 쓸고 닦고 단장하느라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백제 관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신문신사 언덕 위에 겹겹이 둘러서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현의 지사를 비롯하여 훈장의 띠를 띤 노인들과 정장의 귀빈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백색 도포의 제관 세 사람이 등장했다.
제관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조차 자기의 것이 아닌 듯 손놀림 한가지와 안면의 근육까지 신의 뜻을 헤아려 바치는 듯 경건한 제사를 드렸다. 숨죽여가며 북을 쳤고, 정적을 더하듯 숨죽여 피리를 불었고, 앉고 일어서고 앉고 일어서서 합장 배례하기를 여러 차례, 제문을 읽는 목소리는 제관들의 목숨을 묶어내어 놓은 희생과 같았다.
남향 촌 측의 제사가 끝난 뒤 그들의 칼춤까지 끝나 자리걷이를 할 무렵 남향 촌 동구 밖으로부터 징과 꽹과리, 장구와 북소리가 일제히 하늘과 땅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있던 하늘과 땅과 사람들의 숨통을 시원하게 터주는 활기찬 소리였다. 우리의 사물놀이 패가 청청한 목소리로 길을 트며 다가오고 있었다.
천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천 삼사 백년 전에 깊은 산중 남향 촌으로 쫓겨 들어와서 슬픔과 한을 묻어두고 지금도 백제 하늘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을 백제 혼을 불러일으켜 한판 춤으로 다시 살기 시작한 뜨거움이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사물놀이도 한몫>
남향 촌의 제사와 우리의 사물놀이는 참으로 묘한 대조였다.
백제 왕족이 목숨 하나를 끌어안고 쫓겨 들어와 애절한 한 생을 마치면서 시작된 천년의 역사를 안고 이제 남향 촌 깊고 깊은 산 속 마을에서 사물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이것은 누구의 연출인가. 이 역사의 명령은 언제 계획된 것인가.
신문신사는 백제왕인 정가왕을 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을 신으로 섬겨 천수백년을 한결같이 정성스럽게 받들어온 것은 물론, 매년 한차례씩 일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대한 의식을 지금까지 치르고 있는 것이다. 「백제왕족친자대면축제」라 하여 전통적으로는 9박10일에 걸쳐 인근마을 전부가 참여하는 대축제였다.
전설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660년께 시작된다. 더러는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왕자 중 하나였다고는 하나 고증할 길은 없고, 왕족임에는 틀림없는 백제 인이 가솔과 무관·하속을 거느리고 백제 땅을 벗어나 몇 척의 배로 뱃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한국 서해 쪽의 해류는 동해 구주 쪽으로 흐르고 있어 배를 젓지 않고 그냥 두어도 구주 쪽 어느 해안에고 닿게되어 있다고 했다.

<인근 마을까지 축제에>
그러나 정가왕의 가족이 나누어 탄 세척의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났고 장남인 복지왕과 작은아들 화지왕, 그리고 왕비는 각각 흩어져 생사를 알 길이 없게되었다. 아버지 정가왕은 지금의 일향인 「금ケ빈」에 표착하여 남향촌 신문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아들 복지왕은 어머니를 모시고 구사일생 교구포에 이르러 목성정 비목에 정착했다.
나라를 잃고 세상의 땅 끝과도 같은 산골에 숨어살면서 아들들과 아내의 생사여부에 간장이 졸아붙던 아버지에게 어느 날 아들의 생존소식이 날아왔다. 그러나 모자가 정착한 곳은 남향 촌에서도 2백여 리 먼 거리의 산골 마을. 그때까지도 집요하게 그들 부자를 추격하고 있던 추격 군들에게 들킬세라 부자는 추격군의 눈을 피해 애타는 상봉을 해야했다.
마땅히 합솔하여 살았어야 했지만 신라군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어느 쪽이든 살아 남으려면 불가피하게 처소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 부자의 애달픈 사연이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고대사상 가장 큰 동란이었던 「임진난」(672년)은 귀화한 백제 계와 신라 계 사람들 사이의 극렬한 싸움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남향 촌에서 평화롭게 살고있던 정가왕은 끝내 추격 군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 화지왕도 그때 전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년에 한 번 부자 상봉>
그렇게 목숨을 잃기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1년에 한번씩밖에는 만나지 못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한 곳에 몰려 있다가 떼죽음을 당하는 일을 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전사한 정가왕을 따라 왕을 모시던 시녀 12명도 왕의 시신에 매달려 순사했다는 전설이 남겨져있고, 그때부터 정가왕을 신으로 모시면서 복지왕 사후에 부자 상봉의 형식을 축제로 지내 내려오기를 천년 넘겨 이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 복지왕이 살았던 비목에서 아들 역을 맡을 사람을 뽑아 궁사·신직 등 제관들이 비목을 출발하여 아버지가 살았던 남향 촌 신문까지 마을마다 들러서 의식을 갖추며 행진하여 돌아오기까지 9박10일. 대개 음력 12월14일에 출발하여 23일 돌아오는 일정인데 아버지를 만나는 남향촌에서의 하룻밤은 만남의 기쁨으로 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으면 재회의 기쁨도 다 누리지 못하고 곧장 길을 떠나야 한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을 안고 왔다가 다 풀지 못한 회포는 넘치는 눈물이 되지만 반드시 살아남아야 될 의지는 그 눈물을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오사라바」 목소리 쟁쟁>
그들의 만남에는 엄숙하고 장렬한 절차가 따르지만 헤어짐에는 더욱 비장한 형식이 있었다.
1년 내 쌓이고 쌓인 그리움을 단 하룻밤의 만남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애절함 앞에서도 슬픈 빛을 띠거나 눈물을 보여서 안 되는 것이 그들 이별의 불문율이었다. 돌아가는 비목 측 신직·궁사의 얼굴에 앙괭이를 발라 슬픈 빛을 감출 수 있게 하고, 배웅을 나가는 부녀자들은 비목사람들을 배웅하되 바구니나 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혹여 라도 그 이별을 슬퍼하여 눈물이 흐르면 부왕 앞을 떠나가는 복지왕에게 슬픔을 더해 준다하여 눈물을 감추는 방법이었고 남자들 얼굴에 앙괭이를 그리는 것도 슬픈 빛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도리이를 벗어나 정해진 지점에 이르면 보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마주 보면서 구슬픈 피리소리에 맞춰 일제히 "オサラバ-"(오사라바-)를 외쳤다. 그 애절한 인사말은 피리소리에 섞여 애달픈 흐느낌으로 허공을 흔들고, 그들은 1년 후 다시 만날 희망을 안고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오사라바-"(オサラ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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