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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통일부 쇄신, 尹 1년 별렀다…단초는 노조의 '항명 성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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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통일부 장·차관은 물론 대통령실 통일비서관까지 모두 비(非)통일부 출신을 임명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사실상 정부의 통일·대북 라인 전체를 한꺼번에 교체한 극히 이례적인 이번 인사를 놓고 여권의 핵심 인사들 사이에선 "윤 대통령이 1년을 벼르던 인사를 결국 단행한 것"이란 말이 나온다.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 통일부 현판을 관계자가 닦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 통일부 현판을 관계자가 닦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대통령실은 정부 출범과 함께 대북 관계를 관할하는 통일부를 정부의 국정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부처로 여겨왔다"며 "그러나 주요 계기가 발생할 때마다 통일부 내에서 국정 철학에 반하는 의견이 표출돼 온 것에 대해 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특히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때 통일부 노조가 사실상 정부의 기류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 결과적으로 이번 인사의 단초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7월 통일부는 2019년 발생했던 탈북 어민 북송 사건에 대해 "흉악범에 대한 북송은 타당한 결정"이라고 했던 전임 문재인 정부의 발표를 번복하고, "당시 북송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입장을 발표한 뒤 북송 당시의 사진과 영상을 잇달아 공개했다.

그런데 당시 국가공무원노동조합 통일부지부(통일부 노조)는 이러한 결정에 대해 "통일부가 탈북어민 북송 사진과 동영상 공개를 하면서 북송에 관한 기존 입장을 번복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노조는 이어 "귀순과 송환 사이의 법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사법적 판단만으로 결정하겠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판단"이라며 정부의 결정을 정치 논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통일부는 지난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지난해 7월 공개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 사진은 탈북어민이 몸부림치며 북송을 거부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연합뉴스

통일부는 지난 2019년 11월 판문점에서 탈북어민 2명을 북한으로 송환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을 지난해 7월 공개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 사진은 탈북어민이 몸부림치며 북송을 거부하는 모습. 사진 통일부=연합뉴스

정부 출범 첫해에 벌어진 통일부 공무원들의 집단적 움직임에 대해 여권 내에서는 강한 우려가 제기됐다고 한다. 여권 관계자는 "'북한에 대화의 문은 열어두되, 불법적·불합리한 행동에 대해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핵심 철학"이라며 "당시 통일부 공무원들의 사실상의 집단 행동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 중앙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노조의 성명 발표 직후 대통령실 인사·공직비서관실 등이 나서 통일부 내 조직 문화 전반에 대한 점검을 시작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대통령실은 다만 통일부 공무원들의 사기 저하나 업무 효율 등을 우려해 현장 감찰 대신 다양한 채널을 활용한 사실 확인과 유선 조사 등을 벌였다. 그런데도 당시 조사의 결론은 "상황이 심각하다"였다고 한다.

통일부가 지난 4월 공개한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 표지와 면책문구(Disclaimer). 보고서 캡처

통일부가 지난 4월 공개한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 표지와 면책문구(Disclaimer). 보고서 캡처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인사는 이날 통화에서 "새 정부 들어 역동적인 인사가 이뤄진 부처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부처가 있었는데 통일부는 그렇지 않은 부처라는 사실상의 결론이 났다"며 "정부의 핵심 정책 과제나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등에 참여한 전문가의 구성 등이 정부의 국정 철학에 부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정부가 북한 김정은 정권의 인권탄압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공개하기로 결정한 '북한인권보고서'는 통일부에 직접 '메스'를 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된 또 다른 주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통일부는 지난 3월 한글판 북한인권보고서에 이어 4월엔 영문판을 발간했다. 공신력 있는 기초 자료로 북한의 실상을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영문판 보고서에는 한글판과 달리 "정확성을 보증 못 한다"는 내용의 '면책조항(Disclaimer)'이 담겼다. 이러한 사실은 본지 보도(5월 29일자 6면)로 확인됐고,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중앙일보의 보도 직후 그간 최소화했던 현장 조사를 포함한 통일부에 대한 본격 진상 파악 체제로 전환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정부의 핵심 인사는 "세계에 알릴 보고서에 '탈북자들의 발언에 기초한 보고서는 신뢰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소위 진보 진영의 논리를 담은 것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며 "북한의 인권 실상을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밝혔던 정부의 국정 기조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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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의 조사 과정에서는 통일부가 최근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진행한 외부 용역을 심사하면서 특정 진영에 편중됐다는 오해를 줄 수 있는 심사위원단을 구성했던 사례도 일부 확인됐다고 한다.

장·차관을 비롯해 대통령실 통일비서관까지 핵심 라인 전원을 외부인사가 맡게 된 통일부의 분위기는 이날 하루 종일 뒤숭숭했다. 반면 이날 지명된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앞으로 우리의 대북 정책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윤 대통령이 자신에게 통일부를 맡긴 이유가 사실상 '원칙적 대북 정책'의 재확립에 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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