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北인권보고서 면책조항에…대통령실, 통일부 12시간 감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이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에 "정확성은 보증 못 한다" 등 내용의 '면책 조항'(Disclaimer)이 삽입된 데 대해 지난 26일 통일부를 상대로 12시간 가까이 감찰을 실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일부는 중앙일보 단독 보도("널리 쓰라"던 北인권보고서 영문판엔 "정확성 보증 못해")와 대통령실 감찰 후 이틀 만에 입장을 바꿔 "최종본에는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국문판과 동일한 내용으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서울 용산 대통령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면책 조항' 경위 집중 조사 

28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지난 26일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12시간에 걸쳐 통일부를 긴급 감찰했다.

대통령실은 국문판에는 없었던 "정확성은 보증 못 한다"는 문구가 영문판에는 '면책 조항'의 형식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법적 검토를 거쳐서 누구의 지시로 이뤄진 것인지 등에 대해 관련자를 면담 조사했다고 한다. 통일부에 따르면 영문판 발간은 당초 국문판을 만들었던 북한인권센터가 아닌 통일부 본부 내 관련 국을 중심으로 내부 인력을 활용해 이뤄졌다.

앞서 통일부는 지난달 26일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에 "통일부는 이 보고서에 담긴 수치, 분석, 의견 등 정보의 정확성, 완결성, 신뢰성, 적시성에 대해 보증(warrant)하지 않는다" 등 내용의 '면책 조항'(Disclaimer)을 추가해 논란이 일었다.

통일부가 3월 30일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 국문판과 지난달 26일 발간한 영문판을 비교한 결과, 영문판에만 보고서 맨 앞머리에 '면책 조항'(Disclaimer)이 추가됐다. 통일부는 해당 대목에서 "통일부는 이 보고서에 담긴 수치, 분석, 의견 등 정보의 정확성, 완결성, 신뢰성, 적시성에 대해 보증(warrant) 하지 않는다", "통일부는 어떤 오류나 누락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통일부는 이 보고서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직·간접적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보고서 캡처.

통일부가 3월 30일 발간한 북한인권보고서 국문판과 지난달 26일 발간한 영문판을 비교한 결과, 영문판에만 보고서 맨 앞머리에 '면책 조항'(Disclaimer)이 추가됐다. 통일부는 해당 대목에서 "통일부는 이 보고서에 담긴 수치, 분석, 의견 등 정보의 정확성, 완결성, 신뢰성, 적시성에 대해 보증(warrant) 하지 않는다", "통일부는 어떤 오류나 누락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통일부는 이 보고서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직·간접적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보고서 캡처.

윤석열 정부는 대선 공약에 따라 민정수석실을 폐지했지만, 공직자 업무 태만 및 비위 감찰 등 업무는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여전히 맡고 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앞서 지난 1월에도 유시춘 EBS 이사장 선출 건 등을 들여다보기 위해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들을 불러 감찰에 나선 바 있다.

대통령실이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 관련 중앙일보의 보도 당일에 이례적으로 신속한 감찰에 나선 배경과 관련해, 출범 직후부터 "북한 인권의 정확한 실상을 국내외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했던 국정 기조가 반영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삭제하겠다" 말 바꾼 통일부 

대통령실 감찰이 시작된 뒤 통일부는 이날 중앙일보에 "당초 유엔 기구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여 면책조항을 기술했으나, 언론의 지적 사항 등을 반영해 최종본에는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국문본과 동일한 내용으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26일 통일부는 정례브리핑에서 "공신력 있는 유엔의 보고서들에서도 면책조항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종본 발간 시에는 면책 관련 조항들을 압축해서 반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이틀만에 '압축 반영'에서 '삭제'로 입장을 선회한 셈이다. 당초 통일부는 지난 25일 중앙일보 취재가 시작하자 시정 의사를 밝혔다가 '윗선'의 지시로 철회했다. 그러다 결국 대통령실의 감찰을 받은 뒤에야 이를 재차 번복한 셈이 됐다.

특히 통일부가 지난 26일 본지 보도에 대해 정례브리핑에서 제시했던 해명의 상당수도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통일부는 "공신력 있는 유엔의 보고서들에도 면책 조항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공신력 있는 보고서'의 실례는 들지 못했다.
 정확히 어떤 보고서를 칭하는지 중앙일보가 같은 날 질의하자 통일부는 즉답을 피한 채 정부 보고서가 아닌 유엔난민기구 난민종합정보시스템의 '저작권, 이용 약관, 면책 조항' 웹페이지를 유일한 근거로 제시했고, 이후 28일엔 "(유엔 보고서가 아닌) 유엔 기구 홈페이지 등을 참조했다"고 해명했다.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통일문화행사 '광화문에서 통하나봄'을 찾은 시민들이 북한 인권 침해 실상을 알리는 전시물을 관람하는 모습. 뉴스1.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통일문화행사 '광화문에서 통하나봄'을 찾은 시민들이 북한 인권 침해 실상을 알리는 전시물을 관람하는 모습. 뉴스1.

"면책조항 찾기 힘들어" 

통일부의 당초 설명과 달리 북한 인권 관련 가장 권위 있는 유엔 문서로 평가 받는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비롯해 서울 유엔 인권사무소가 생산하는 각종 보고서 등에도 면책 조항은 찾아볼 수 없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2014년 COI 보고서와 북한 인권 결의안도 기본적으로 탈북민의 증언을 기반으로 정리하지만, 면책조항은 없다"며 "통일부가 북한인권보고서에 명시한 면책조항은 자칫 탈북민의 증언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불필요하게 부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 소식통도 "정부가 발간하는 정책 보고서는 정확하고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료해야 신뢰를 얻는다"며 "특히 원본에 없는 내용을 영문본에만 삽입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7년 만에 보고서 냈지만…

통일부는 2016년 제정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2017년 1월부터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북한인권 실태 조사를 벌였지만,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지난 정부에선 그 결과를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다.

그러다 윤석열 정부 들어 법 제정 7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인권보고서의 국문판을 3월 30일에, 영문판을 지난달 26일에 차례로 공개했다. 다만 영문판에 '면책조항'이 삽입되고 통일부의 오락가락 해명으로 논란이 불거지자 북한인권단체에선 "탈북민 증언을 바라보는 전임 정부의 시각이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대표는 "피해자의 증언에 대해 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가해자 측이 하는 경우는 있어도 세계 어떤 나라도 정부가 그러지는 않는다"며 "면책 조항을 넣은 것은 통일부 스스로 실태 조사가 부실하다고 국제사회에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며, 지난 정부의 인권관의 연장선이라는 의구심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