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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미들파워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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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에디터

김동호 경제에디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유튜브 중계는 윤석열 대통령의 말대로  불쾌한 장면이었다. “미국 승리에 베팅하면 후회한다” “중국몽 의지를 모르면 탁상공론” 같은 일방적 주장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구한말로 돌려놓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런 훈시와 겁박성 발언에 어느 국민이 마음 편했을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전해진 발언도 떠올랐다.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런 취지로 이해될 만한 발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 한국에 G8 역할 기대
국력에 걸맞은 당당한 외교 필요
한·중 관계서 움츠러드는 건 패착

한국은 엄연한 독립국가다. 언어와 문화, 사회 관습과 제도가 고유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수천 년이 넘는다. 그러나 명·청시대에 조선이 중국 중심의 질서에 놓여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분단되고, 한국전쟁으로 잿더미 빈국으로 전락했다. 한국은 이제 그런 약소국이 아니다. 경제와 군사를 비롯한 하드파워와 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소프트파워까지 갖춘 나라다. 그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국제 외교 무대에선 미들파워로 분류된다. 주요 8개국(G8)으로도 꼽힌다.

10년 전쯤 제주포럼에서의 경험이다. 호주의 전직 총리와 전문가들로부터 “한국은 미들파워”라는 얘기를 처음 듣고 귀를 의심했다. 주변 열강에 늘 당했던 탓에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낮춰 잡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한국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미들파워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주문에 맞춰 한국부터 달라져야 한다. 여전히 중국을 종주국처럼 여기는 조선시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벗어나야 한다. 중국은 한국이 구한말 위안스카이가 휘젓던 약소국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은 나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내정간섭 없이 자국의 책임 아래 경제 및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시대라는 것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국내 일각의 정치인들이다. 이 와중에 중국을 비공개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한·중 관계 악화는 미국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돌아왔다. 물론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중국 측에 “충분히 항의했다”고 했지만 중국의 일방적 주장을 당당하게 반박했다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더구나 세계가 우려하는 인권 탄압 논란에도 티베트까지 방문했으니 정의와 공정, 소수자 보호를 핵심 가치로 내거는 민주당의 활동과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한국은 미들파워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은 명백히 밝혀야 한다. 한국이 최근 미·일과 협력 폭을 넓히는 것은 경제 및 안보 이익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한령과 보조금 차별로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 및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중국 제조업의 비약적 경쟁력 강화와 함께 중국이 국산품 애국주의로 자국 제품을 선호하는 것도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을 약화하는 배경이다.

물론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우호협력을 다져나가야 한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함께 가장 가깝고 미국과 함께 중국은 한국의 최대 시장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잘 지내야 한다. 중국 외교관을 만나 보면 “한·미 동맹을 강화하더라도 한·중 관계를 배려하고 관계를 증진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다만 중국을 배려하는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지는 오롯이 한국이 결정해야 한다. 중국 잣대로 재단하면 그게 내정간섭이 된다.

관성대로 한국을 길들이려는 중국을 상대할 때 우리 스스로 낮추고 움츠러들면 패착이 된다. 중국은 높은 봉우리라면서 거듭 ‘혼밥’을 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달리 윤석열 대통령이 엄중하게 문제를 지적하자 중국 측은 한·중 관계 악화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미들파워에 걸맞은 자세를 보일 때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