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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최저임금과 ‘을(乙)’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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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최저임금에 관한 한 한국 경제는 유의미한 실험 결과를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8~2019년이다. 문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그 이듬해인 2018년의 최저임금을 16.4% 인상했고, 2019년엔 10.9% 올렸다. 2017년 6470원이던 최저임금은 7530원, 8350원으로 높아졌다. 대선 공약대로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향한 질주였다.

그러자 고용 시장이 정부 기대와 다르게 움직였다. 2017년만 해도 매달 20만~40만 명이었던 취업자 증가 규모가 해가 바뀌자 눈에 띄게 줄었다. 급기야 여름에 사달이 났다. 2018년 7월 취업자는 전년보다 5000명밖에 늘지 않았다. 8월 취업자 증가는 3000명에 그쳤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진이 이어졌던 2010년 1월(1만 명 감소) 이래 최악이었다. 경제위기 상황도 아닌데 벌어진 고용 참사였다.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을 내걸고 문 정부가 밀어붙인 최저임금 급상승 외에 다른 요인을 찾기 어려웠다.

최저임금 급등, '소주성' 고용 참사
이번엔 노사 26.9% ↑ 대 동결 대립
과도 인상, 시장 약자 궁지로 몰아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증가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은 틀린 얘기가 아니다. 항상 그렇듯 소득을 어떻게 늘리느냐가 관건이다. 소주성은 최저임금을 올려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사업주가 최저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은 괜찮았다. 하지만 상당수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법을 어길 수 없는 이들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문을 닫든가, 직원 수를 줄이든가. ‘을’과 ‘을’의 전쟁이 벌어졌다. 중소기업, 식당, 편의점, 노래방에서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아르바이트생도 잘렸다. 법정 최저임금 인상이 근로자 소득 증대로 이어지리라 여겼던 순진함이 빚은 참사였다. 임금 올려줄 돈이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이후 문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한다. 2020년 인상률은 2.9%. 문 대통령은 ‘3년 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며 사과했다. 당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소득은 또 다른 누군가의 비용이다. 그 소득과 비용이 균형을 이룰 때 국민경제 전체가 선순환하지만, 어느 일방에게 과도한 부담이 될 때는 악순환의 함정에 빠진다.” 뒤늦은 반성이었다. 고용 시장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다음이었다.

최저임금 급발진은 한국 경제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주당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취업자 급증을 빼놓을 수 없다. 법에 따르면 이들에겐 주휴수당, 퇴직금, 연차 휴가를 주지 않아도 된다.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자영업자들이 일자리 한 개를 여러 개의 초단시간 일자리로 쪼갰다. 주당 14.5시간 구인 공고가 쏟아졌다. 소득도, 고용 안정성도 충분치 않은 초단시간 취업자 수가 지난 5월 155만 명. 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93만 명)보다 62만 명 불어나 있다. 게다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선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근로자가 30%나 된다.

다시 최저임금 협상 시즌이다. 노동계는 26.9% 인상(1만2210원)을 요구하고, 경영계는 동결(9620원)을 주장한다. 물가 오름세가 꺾였다지만 여전히 낮지 않다(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3.3%). 경영계 주장대로 동결이면 실질 최저임금은 삭감인 셈이다. 문제는 소폭의 인상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소상공인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또 사업을 접거나 눈물을 머금고 직원을 내보낼 것이다.

최저임금제도는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소주성의 실패를 겪고서도 변한 것이 없다. 최저임금을 지나치게 올리면 시장 약자가 더 궁지로 내몰리는 모순적 상황도 그대로다. 업종별로 최저임금을 달리하자는 소상공인 주장은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근로자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소주성 신봉자’가 너무 많다. 내년 최저임금이 또다시 을들의 전쟁을 부추기게 될까 벌써 조마조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