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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 '복붙'해 엉뚱한 내용 넣은 의원…렉카법도 수두룩한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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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5월 24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2소위에 법안심사자료가 바닥에 놓여 있다. 뉴스1

지난 5월 24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2소위에 법안심사자료가 바닥에 놓여 있다. 뉴스1

21대 국회에서도 이슈만 터지면 우후죽순 법안을 내거나, 법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엉터리 법안이 발의되곤 했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28일 기준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률안은 2만2250건이다. 이 가운데 처리된 법안은 6647건(대안반영 폐기 포함)으로 처리율은 28.9%에 그쳤다. 수치상으로 국회의원(총 300명) 한 사람당 평균 74건의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국회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법안 발의 숫자가 정당별로 의원평가 항목에 들어가다 보니, 토씨만 바꿔 법안을 발의한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했다.

①엉뚱한 ‘복붙’

더불어민주당 출신 김남국 무소속 의원이 2020년 8월 발의한 ‘검사 기피제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은 현행법이 허용하고 있는 ‘판사 기피제’를 차용한 법이다. 검사가 피의자·피해자의 친족·법정대리인이거나 사건에 대한 증인·감정인인 경우 수사과정에서 배제될 수 있도록 한 내용이다. 또 이 경우 피의자·피해자는 해당 검사에 대한 기피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김 의원은 발의안에서 “검사의 처분에 대해 항고 등 재정신청 제도가 있지만 인용률은 9.7%에 불과해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부족하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남국 무소속 의원이 6월 27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김남국 무소속 의원이 6월 27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김현동 기자

논란이 되는 부분은 검사 기피 사유로 ‘사건 증인인 경우’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증인은 재판 과정에서 나오는 개념이기 때문에 재판 이전 단계인 수사 과정에서 검사를 기피하는 사유로 명기된 건 법리적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해당 조항은 판사 기피제를 명기한 형사소송법 17조 4항(법관이 사건에 관해 증인·감정인·피해자의 대리인일 때)과 구조가 같다. 김 의원실 관계자는 “판사 기피제를 본떠서 만들다 보니 해당 조항이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다만 국회 법사위는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형사 절차상 공정성 확보는 수사 과정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에 검사 기피제의 취지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②위헌 논란에도 발의

위헌 가능성에도 법안이 발의된 경우도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4월 발의한 ‘상습 음주 운전자 신상공개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이 법안은 10년 이내 2회 이상 음주운전이 적발된 운전자나 음주운전으로 타인을 숨지게 한 운전자의 얼굴·이름·나이 등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내용이다.

하 의원은 발의안에서 “지난 4월 대전에서 만취 운전자가 초등학생 4명을 들이받아 3명이 중상을 입고 1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처벌 강화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위 ‘배승아양’ 사건으로 국민 공분이 커지자 음주 운전자 가중처벌 성격의 법안을 발의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2회 이상 음주 운전자를 가중처벌하는 ‘윤창호법’은 2021년 11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았다. 당시 재판관들은 “가중 요건이 되는 과거 음주운전 금지규정 위반행위와 처벌대상이 되는 재범 음주운전 금지규정 위반행위 사이에 시간적 제한이 없다”며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을 들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이에 하 의원실 관계자는 “의원실에서 10년 이내 음주운전 2회 이상으로 가중처벌 대상을 명확히 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해 위헌 소지가 해소된 상태”라며 “‘상습 음주운전자 신상공개법’에도 10년의 시한이 설정돼 있어 위헌 논란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민주당 관계자는 “책임과 형벌 간 비례원칙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는 상습 음주운전자 차량에 형광 번호판을 부착하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최연숙 국민의힘 의원안)도 발의돼 있다.

③이슈에 쏟아내는 ‘렉카법’

지난해 10월 발생한 이태원 참사 관련해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법안을 쏟아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이달 28일까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개정안이 총 37건 발의됐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처럼 주최가 불명확한 행사의 경우 관할 지방자치단체장이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하는 내용인데, 현재까지도 처리된 법안은 없다. 민주당·정의당 등 야3당이 지난 4월 발의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안’도 현재 계류 중이다.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논란으로 탄핵 소추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네번째 변론기일인 6월 2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의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논란으로 탄핵 소추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네번째 변론기일인 6월 2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의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의 땅 투기 의혹이 불거졌던 2020년 말에도 국회에서는 ‘부동산 투기근절법안’(공공주택특별법 개정안 등)이 30여건 발의됐다. 국회 관계자는 “법안 처리를 위해서는 시일이 오래 걸려 시행령을 개정하는 것이 효율적인데도 개정안을 우후죽순 내는 경우가 많다”며 “한 차가 가면 다른 차가 우르르 몰려가는 견인차에 견줘 ‘렉카법’이라는 지적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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