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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반이 '답사' 유홍준 "답사기 완간? 이젠 안 팔려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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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안 팔려야지. 더 좋은 책이 나와 이 책을 잡아먹어야 우리 문화유산계가 더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아직까지는 대체품이...."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인터뷰 #1993년 1권부터 답사 붐 일으켜 #30주년 기념판 '아는 만큼 보인다' #완간은 "국토박물관 순례" 구상중

 유홍준(74) 명지대 석좌교수에게 새 책 때문에『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하 답사기) 다른 책이 안 팔리면 어쩌냐고 했더니, 돌아온 답변이다.

 새 책 『아는 만큼 보인다』(창비)는 답사기 30주년 기념판. 지금껏 열 두 권의 국내 답사기에서 전국 곳곳 14편 글을 뽑아 한 권에 담았다. 유 교수는 답사기에 대해 "젊은 세대가 좋은 책인 줄은 아는데 양이 방대해 접근하기 쉽지 않다"며 새 책을 "'에센스'만 골라 쉽게 볼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책이 팔리는 것보다, 어떻게 완간할 것인가가 내게 숙제이자 과제"라며 작심한 듯 지난 얘기를 풀어냈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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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다시피 그의 답사기는 1993년 1권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문화유산 답사'라는 말조차 새롭던 시절, 대대적인 답사 붐을 일으키며 1년 만에 백만부 넘게 팔렸다.

 유 교수는 "처음에는 원고료를 못 받고 연재한 글"이라고 했다. 1991년 학계의 지인들이 창간한 잡지 '사회평론'에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3회 정도로 그만두려 했단다. 한데 독자 반응이 대단했다. 한 차례 원고를 펑크 내자 편집부에 항의 전화가 쇄도했는가 하면, 창비를 이끌던 백낙청 서울대 교수는 첫회를 보고 바로 출간 제의를 했다고 한다. 1권의 열기는 독자들의 온갖 지적·질문을 모아 이듬해 나온 2권 말미에 수록했던 답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를 유 교수는 "민주화 이후 큰 사회적 이슈가 없었고,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왔다"고 돌이켰다. 무엇보다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싶은 욕구가 컸다. "영화 '서편제'의 흥행도, 박동진 명창이 광고에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한 것도 그 무렵이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출간 때는 영남대 교수였지만, 처음 연재 때의 그는 "백수"이자 "마당쇠"였다.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미술 평론에 뜻을 두고 잡지 '계간미술' 기자를 1983년 그만둔 터. 이듬해부터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 공개강좌를 시작했다. "미술대학에도 한국미술사 강의가 없는 곳이 많을 때였어요. 슬라이드 강의를 하는 곳도 별로 없었죠." 대학가에 붙인 포스터를 보고 모여든 수강생들과 문화유산 답사회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성장을 많이 했다"며 "그때 만든 교재를 지금 보면, 이 실력 갖고 강의를 한 게 용기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했다.

 "마당쇠"는 '우리마당' '한마당' '그림마당 민' '예술마당 금강' 등 당시 강의가 열린 곳에 '마당'이란 이름이 많기도 했기 때문. 나중에 학전 소극장 강의는 수강생이 넘쳐 1000석 규모 다른 시설을 빌려야 했다고. 역사·미술 교사들과 화가들이 많았던 수강생 역시 "일반인부터 귀부인까지" 몰려왔다고 한다.

 공부만 아니라 다년간 현장 강의·답사로 쌓인 내공과 화법의 매력은 책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답사기가 성공하자 백낙청 교수는 "'학삐리' 50%, '딴따라' 50%가 절묘하게 만났기 때문"이라고 그의 글을 평했단다. 틀에 박힌 형식 대신 문화유산마다 초점을 달리하며 에피소드까지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전개는 읽는 맛을 더했다. "명언 리메이크"도 강력했다. 새 책에도 나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나 6권 제목 '인생도처 유상수' 등 옛사람들의 말이 여럿 그를 통해 새롭게 퍼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주년을 맞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권혁재 기자

 그는 "내 인생에서 답사기는 반이고, 미술사가 반"이라고 했다. 답사기 이전에, 르네상스 시대 여러 예술가를 아우른 조르조 바사리의 책에 감동 받아 우리 화가들 열전을 쓰고 싶었단다. 1997년 3권 이후에는 논문·평론에만 집중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한데 중앙일보가 추진한 방북단 일원으로 분단 이후 처음 북한 문화유산을 답사할 기회가 생겼다. 답사기는 한반도 곳곳으로 이어졌다.

 답사기 완간도 실은 구상이 다 있다. 그의 오랜 지론처럼 "국토박물관" 순례가 초점. 구석기시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신석기시대 부산 영도 동삼동패총 등 역사 순으로 문화유산은 물론 그 지역 다른 유적지와 명소까지 세 권 분량에 소개할 생각이다.

 도대체 이 많은 곳을 어떻게 숱하게 답사할 수 있었을까. 첫째 비결은 "술을 잘 안 하는 것", 그다음은 "유물과의 대화"를 강조했다. "유물들을 보고 감동을 많이 했어요. 책으로 볼 때는 별거 아닌 데 현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거야." 미술잡지 기자 때 출장을 자원해서 다녔다는 그다.

 끝으로 물었다. 유홍준에게 문화유산답사기란. "나는 학문의 사회적 실천,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은 자기가 공부한 전문적 지식을 동시대 사람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해서 같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진정한 전문성은 전문적 지식을 대중도 알아들을 수 있게 쓰는 것"이라며 "전문서·대중서를 구별하는 풍토가 우리 인문학이 대중에게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고도 지적했다. 답은 이렇게 이어졌다. "한국미술사의 전도사로서 내 신앙은 한국미술사이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내 신앙의 전도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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