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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진료 지원인력’ 양성 시스템 정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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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

‘진료 지원인력’(PA·Physician Assistant)이란 의료 용어가 요즘 자주 등장하고 있다. 속칭 ‘PA’라 불리는 이들은 국내에서 병상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부족한 의사 인력을 대신하기 위해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으로 7000~1만 명으로 추산된다.

진료 지원인력이 최근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배경이 있다. 의사가 해야 할 주요 업무를 진료 지원인력이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민원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부의 의뢰를 받아 진료 지원인력 실태조사를 수행한 경험이 있다.

병원마다 과거에는 전공의나 전문의가 해오던 주요 의료행위의 상당 부분을 진료 지원인력이 수행하고 있는 사실을 실태 조사에서 확인했다. 조사 결과 90% 이상의 진료 지원인력은 대부분 간호사인데, 경우에 따라 응급구조사나 다른 면허·자격을 보유한 의료인력인 경우도 있었다.

의사업무 대행 놓고 갈등 커져
실제 일하지만 ‘유령’처럼 취급
간호사 등에 위임 영역 정해야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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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의료 소비자인 환자들은 의사의 의료행위인지 진료 지원인력의 의료행위인지 모르고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진료 지원인력의 훈련 과정을 살펴보면 체계적으로 양성되지 않아 병원마다, 진료과마다 편차가 매우 심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진료 지원인력이 직접 행하는 의료행위가 마치 유령처럼 기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영국·캐나다 등지에서는 진료 지원인력이 합법적으로 양성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통상적으로는 3년 과정인 ‘PA 양성 대학원’을 졸업하고 주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정식으로 PA 면허를 받고 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미국의 경우처럼 합법적인 PA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보편적인 조직문화가 근간이 되기에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의료 환경은 아직도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지배적인 상황이다. 미국의 PA 같은 새로운 직역을 졸속으로 도입하면 병원에 근무하는 직역 간, 또는 직역 내부에서 자칫하면 더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최근 야당이 밀어붙여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 개정안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의료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이유로 재의를 요구했고, 국회에서 재표결했지만 결국 부결되면서 폐기됐다.

그 와중에 대한간호협회는 준법투쟁을 선언하고 주요 의료행위 가운데 의사의 고유업무임에도 간호사가 수행하고 있는 ‘불법 업무리스트’를 자체적으로 신고받고 있다. 지금 의료 현장은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진료 지원인력 문제는 한국의 의료 현실에 맞게 차분하게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판단한다. 차분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병원마다 진료 지원인력 관리 및 운영체계를 만들어 교육 훈련의 기회를 체계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병원마다 수행하는 의료행위는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데도 그동안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았던 일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논란이 되는 주요 의료 행위의 직역 간 역할 구분에 대해서는 관련 공공기관에 조직을 갖추고 근거를 찾아가야 한다. 심층적인 논의를 통해 의사의 업무가 진료 지원인력과 간호사 등에게 어디까지 위임 가능한지 교통정리를 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정형외과 환자에게 석고붕대(cast)를 감는 의료행위는 지금도 상당수 병·의원에서 의사가 아닌 인력이 수행하고 있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잘못된 석고붕대로 인해 피부조직이 괴사할 수 있다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반드시 의사가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위임 가능하다는 의견까지 매우 큰 폭으로 의견 불일치가 있다. 의료기술 발달에 따라 과거에는 전공의가 반드시 해야 할 업무도 이제는 다른 선택지도 생기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는 차분함이 사라지고 있다. 갈등이 벌어지면 조정자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의료 현장도 예외가 아니다. 갈등을 방치해 오래가면 갈수록 당사자는 물론이고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와 가족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의료 현장에서 갈등의 중요한 축인 진료 지원인력 문제는 그래서 질서 있게 풀어가야 한다. 차분함을 유지하면서 해법을 찾다 보면 몇 년 뒤에는 지금보다 한결 정리된 형태로 의료 현장이 바로 설 것이라 생각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