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남 '노아의 방주' 띄운 차수막…400m 상점가 중 20곳 무방비 [물난리 그곳 그후 1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참, 하늘을 원망할 노릇도 아니고. 올해는 잃을 것도 없지만.”

 12일 서울 서초구 진흥종합상가에서 만난 이영식(79)씨는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지난해 기록적 폭우가 이곳을 덮치며 상가 지하는 빗물로 가득 찼고, 40곳에 달했던 상점들은 여전히 공실로 남아있다. 40년 넘게 이곳을 지킨 터줏대감 이씨도 긴 세월 많은 어려움에도 가게를 유지했지만, 이번엔 생업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진흥종합상가 지하상가로 향하는 이영식(79)씨. 그는 지난해 8월 8일 내린 비로 1억원 가까운 손해를 보고 장사 재개를 망설이고 있다. 김홍범 기자

지난 12일 서울 서초구 진흥종합상가 지하상가로 향하는 이영식(79)씨. 그는 지난해 8월 8일 내린 비로 1억원 가까운 손해를 보고 장사 재개를 망설이고 있다. 김홍범 기자

상가 지하로 내려가자 사라지지 않은 퀴퀴한 흙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계단 바로 옆이 쌀가게와 정육점을 겸하던 이씨의 가게였다. 이씨는 지난해 8월 8일 판매 중이던 쌀포대로 가게 입구를 막는 등 ‘빗물과의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지하로 쏟아진 흙탕물에 냉장고와 육절기를 버리는 등 1억원가량의 피해가 발생했다. 장사를 재개하지 못한 채 1년 가까운 시간을 소득 없이 지냈다.

이씨는 “고집을 내려놓고 나와 목숨이라도 부지해 다행”이라면서도 “2019년엔 (상가에) 큰불도 나서 손님 자체가 줄었다. 다들 큰돈을 들여 이곳을 정비하는 걸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상가 1층에서 15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이모씨(65)는 “잊히니까 산다. 손님 옷이 다 망가져 버리고 물어준 것만 두 마대였다. 한동안은 발목 높이에 물건을 두는 것조차 두려웠다”고 했다.

지난해 물난리 당시 이영식씨의 가게 모습. 그는 비가 올 당시 판매 중이던 쌀포대로 가게 입구를 막았지만, 빗물은 지하상가 천장 부근까지 차올랐다. 김홍범 기자

지난해 물난리 당시 이영식씨의 가게 모습. 그는 비가 올 당시 판매 중이던 쌀포대로 가게 입구를 막았지만, 빗물은 지하상가 천장 부근까지 차올랐다. 김홍범 기자

 차량과 물건이 빗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지켜본 강남역 5번 출구 인근 상가 관리인들도 수난의 악몽이 반복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빗물에 휩쓸려 실종된 4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된 빌딩에선 사고 이후 시설관리 인력이 모두 교체됐다. 주차장 입구엔 이미 폭우를 대비한 모래주머니가 가득 쌓여있었다.

다만 준비가 미비한 곳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약 400m의 상점가를 걸어보니 빗물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 약 70곳 중 20여곳은 아직 빗물을 막을 차수 시설이 없었다. 1층만 운영 중인 가게가 다수였지만, 여전히 차수 시설 없이 운영 중인 지하 매장도 여전히 적지 않았다. 차수 시설은 높은 방수문을 구비해 ‘노아의 방주’로 불린 이곳 청남빌딩 사례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됐다.

지난해 12일 찾은 강남역 5번 출구 인근 상가에는 아직 지하 차수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곳들도 눈에 띄었다. 사진은 오른쪽 지하주차장 입구엔 차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왼쪽 지하상가 출입구엔 없는 모습. 김홍범 기자

지난해 12일 찾은 강남역 5번 출구 인근 상가에는 아직 지하 차수시설이 설치되지 않은 곳들도 눈에 띄었다. 사진은 오른쪽 지하주차장 입구엔 차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지만, 왼쪽 지하상가 출입구엔 없는 모습. 김홍범 기자

건물마다 다른 높이의 차수판도 위태로워 보였다. 낮게는 30~40㎝부터 1m가 넘는 것까지 차수판의 높이는 다양했다. 전문가들은 물은 얕은 곳으로 흐르는데 차수 시설이 없거나 낮은 쪽에 피해가 집중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창삼 인덕대 스마트건설방재학과 교수는 “상습 침수 지역은 피해가 한 곳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차수 목표 높이’를 설정해 이를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8일 방수벽 밖으로 물이 고인 가운데 청남빌딩 주차장(오른쪽)에는 빗물이 들이치지 않고 있다. 왼쪽 사진은 지난 2011년 7월 방수문 모습.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지난해 8월 8일 방수벽 밖으로 물이 고인 가운데 청남빌딩 주차장(오른쪽)에는 빗물이 들이치지 않고 있다. 왼쪽 사진은 지난 2011년 7월 방수문 모습.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또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는 근원적 배수 대책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서울시는 오는 11월 착공을 목표로 강남역·광화문·도림천 등 ‘대심도 빗물배수터널’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2027년에야 준공이 가능하다. 강남구는 대치동에 빗물펌프장 1곳을 추가하는 공사를 내년 시작하기 위해 주민설명회를 준비 중이다.

서울시는 인명 피해를 우선적으로 막겠다는 입장이다. 올해부터 침수 위험을 미리 알리는 예·경보제를 실시하고 있다. 시간당 강우량 55㎜, 15분 강우량 20㎜, 도로침수심 15㎝를 하나라도 초과하면 예보를 통해 이를 인근 주민들에게 알리고, 현장 확인 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경보를 발령한다. 이동이 어려운 취약자는 미리 선별해 동행 파트너를 배치한다. 서초구는 지난해 사망자가 발생한 맨홀 추락 사고를 막기 위해 서초구가 지난해 1200개, 올해 335개의 맨홀추락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한 강남구청 관계자는 “인명 피해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대비 중”이라면서도 “배수의 경우엔 구조적 문제가 개선되기 전까진 지난해와 같은 이례적 폭우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침수 예‧경보 시스템은 기상 불확실성 때문에 초창기엔 ‘양치기 소년’처럼 보이는 등 운영상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시민들도 이를 감안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