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국제 정원박람회 성공 스토리는 어떻게 가능했나
인구 28만명의 소도시 전남 순천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해 전국의 관광객을 빨아들이는가 하면, 경쟁도시 고흥·창원을 물리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국형 우주발사체 단(段) 조립장을 유치했다. 며칠 전엔 순천대학교가 교육부 지원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대학’에 뽑혀 활력을 더하고 있다.
성공 스토리의 주역은 ‘생태도시’를 밀어붙여온 노관규 순천시장(무소속)이다. 10년만에 두번째로 열린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4월1일~10월31일)는 그의 ‘특허품’이다. 개장 80일(6월19일 기준)만에 목표 대비 61%의 관람객(490만명) 유치와 목표 수익의 93%(235억원)를 달성했다. 고용 창출 2만5000명, 생산유발 효과는 1조5926억원에 이를 것이란 분석(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다.
공장·아파트 회색 개발 포기
삶의 질 바꿀 ‘생태도시’로 전환
50여 지자체, 순천 배우기 열풍
“수도권 접고 올 만한 가치 입증”
이보다 놀라운 건 전국에 불고 있는 ‘순천 배우기’ 열풍이다. 50여곳의 지방자치단체를 포함, 230개의 연구소·기관이 순천을 벤치마킹중이다. 개막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비롯해 수도 서울의 오세훈 시장, 박완수 경남지사, 최민호 세종시장등 숱한 정치인이 순천을 찾았다. 공무원 시찰단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8일 순천을 찾았다. KTX 순천역에서 도보로 5분거리의 동천 선착장에서 요트를 타고 정원으로 향했다. 60만평의 대지에 영국·미국·네덜란드·멕시코등 세계 정원과 다채로운 테마정원이 이어져 있다. 교통체증·잡상인·쓰레기가 없어 쾌적한 순천만 정원, 느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외국 같다”는 관람객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박람회조직위 사무실에서 노관규 시장과 만났다.
인구소멸 위기 속 순천 인구는 늘어
- 처음엔 시 의회와 시민·환경단체의 반대가 거셌다던데.
- “공장 짓고 아파트 지어야지 무슨 생태냐, 천지가 산이고 들인데 무슨 정원이냐는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중소도시가 대도시 흉내 내 경쟁력이 있겠나.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아파트·공장 짓는 회색 개발은 한계에 왔다.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자연을 기초로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 산업단지가 없는데도 순천 인구는 늘었다.
- “호남 22개 시·군중 13개가 소멸 위기인데 오히려 순천은 광주·전주에 이은 세 번째 도시가 됐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순천에 온 건 여기서 일할 고급인력들이 이 정도 정주여건이라면 순천에서 살고 싶다는 여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생태도시로 방향을 정하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경쟁요건을 갖춘 게 굉장한 효과를 낸 것이다.”
우리에게 정원 문화는 낯설다. 역사적으로도 정원 가꾸기(gardening)와는 거리가 멀었거니와 산업화와 함께 아파트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정원과 단절됐다. ‘정원’ 하면 ‘텃밭’을 떠올리기 쉽지만, 텃밭은 생산과 노동의 공간이고 정원은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란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원박람회는 역발상의 산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시는 발상을 전환해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창의시정을 강조해왔는데, 그 사례를 순천에서 봤다”고 극찬했다.
- 순천의 목표는 관광도시인가.
- “관광도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과제가 수도권 일극체제 해소 아닌가. 공기업 강제 분산시키고 공장부지 만들어놓고 가라고 하지만 안 된다. 수도권을 포기하고 올 만한 다른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이 키우고 자신들이 재충전하고 노후까지 보낼 수 있는 도시라는 걸 보여준 게 순천이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나눠 지고 국가균형 발전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4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잔디광장으로
노 시장의 정원박람회 구상은 2009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흑두루미의 97%가 월동한다는 일본 이즈미(出水)시를 견학, 몸집이 큰 흑두루미가 의외로 전깃줄에 걸려 많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천만 일대 283개의 전봇대를 뽑고 전선을 없앴다. 전세계 흑두루미 1만8000마리의 60%가 넘는 1만여마리가 찾아오는 세계적 흑두루미 월동지로 자리잡으며 순천만이 되살아났다.
올해는 업그레이드된 실험을 했다. 초고층 아파트 단지 밀집지역인 오천동 앞 4차선 아스팔트 도로 1.2㎞ 구간을 잔디로 덮어 맨발 산책이 가능한 잔디 광장(그린 아일랜드)으로 바꿨다. 정원이 도심의 일상 속까지 스며들어온 것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0년 전부터 순천시청에서 정원박람회 실무를 이끌어온 최덕림 총감독의 말이다. “전봇대 뽑기로 직접 피해를 보는 농민이 5000명, 가족까지 따지면 1만~2만표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치인으로선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손해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 가자’는 시장의 결심으로 순천만 생태계 보전지구로 지정할 수 있었다.” 최 총감독은 “반대하던 시민들도 요즘은 이 정도로 살기좋은 도시가 된다면 불편은 감내할 수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며 “‘노 시장이 고생하고 수고하셨다’는 얘기를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며 달라진 민심을 전했다.
고졸 출신 검사, 순천시장만 세 번
노 시장은 특이한 이력의 정치인이다. 고졸(순천매산고) 출신으로 구로공단 노동자→세무공무원을 거쳐 4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 검사가 됐다. 2000년 수원지검 검사를 끝으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2006년(민주당)과 2010년(무소속) 연거푸 순천시장에 당선됐으나 총선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신 그는 지난해 세 번째로 순천시장(무소속)에 취임하며 10년만에 부활했다. 시련이 그를 더욱 단련시킨 것일까. 노 시장은 “닥치는대로 잡다하게 책을 읽었다. 비로소 고민하던 것들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 성공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 “도시는 지자체장이 공부한만큼 발전한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를 해야 생각의 눈높이가 높아져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아무리 시장의 역량이 있어도 철학과 비전을 현실로 실현시켜주는 건 공무원이다. 공무원을 설득하고 그들이 긍지와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게 시장의 리더십이다. 또 시민들 눈높이가 그 수준이 돼야 한다. 시장-공무원-시민의 3합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 공무원 설득의 비결은 뭔가.
- “시장의 무기는 인사권이다. 칸막이를 허물어 행정·토목·해양등 필요한 직능을 한군데로 합쳐 일할 수 있게 하고, 과장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1명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사를 냈다. 시장이 인사권을 포기하고 권한을 준만큼 책임도 지게 한 것이다.”
- 시민 설득이 쉽지 않았을텐데.
-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고 전액 정원박람회에 썼다. 도시의 근본적 동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거다. 직접 24개 읍·면·동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했다. ‘여러분이 다섯아이 부모다. 넷째 대학등록금이 고민인데 다섯째가 명품 운동화 사고 싶어한다. 부모라면 밤새 고민 끝에 명품 운동화를 포기하고 대학 등록금에 쓰자고 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더니 고맙게도 시민들이 따라와주더라.”
오세훈-노관규의 특별한 인연
정치권에선 오세훈 서울시장(국민의힘)과 노 시장의 특별한 인연과 협력에도 주목한다. 각각 무상급식 파동과 총선 낙선으로 정치적 공백기를 맞았다 10년만에 나란히 부활했다. ‘정원과 같은 도시 서울’과 ‘생태도시 순천’을 표방, 협력 중이다. 오 시장이 간부들을 데리고 박람회를 관람했고, 지난달엔 노 시장이 서울시 팀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노 시장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정원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제국을 이뤘거나 꿈꿨던 나라들”이라며 “오 시장의 인문적·철학적 눈높이가 굉장한 수준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기초단체장인 내게 강연을 하게 한 건 오 시장이 가슴과 통이 크고, 사람을 널리 구하고 쓰려 한다는 의미”라고도 했다.
오 시장은 “정원박람회 같은 큰 규모의 행사를 하려면 보통 대학교수나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는데, 10년 전에 일한 사람을 다시 발탁해 권한을 주고 일하게 한 용인술이 놀랍다”며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을 해낸 순천이 지방행정 업그레이드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호평했다.
“순천에 월트 디즈니 만드는 게 꿈”
인터뷰 말미에 노 시장은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며 애니메이션 클러스터 사업을 설명했다. “순천 3개 대학에 애니메이션 학과가 있다. 졸업하면 수도권에 올라가 고시텔·원룸 전전하다 우울증 생기고 가족도 힘들게 한다. 지방도시도 고급문화산업을 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월트 디즈니같은 회사를 왜 순천에 못 만드나?”
‘정원 쓰나미’를 몰고온 ‘노 작가’(시청 직원들은 노 시장을 이렇게 부른다)의 꿈이 이뤄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