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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그 난리에도 하늘만 본다…전국 1만가구 '장마철 무방비' [물난리 그곳 그후 1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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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10일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동작구 직원들이 수해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8월 10일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동작구 직원들이 수해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기록적인 ‘폭포비’와 태풍 힌남노가 전국 곳곳을 휩쓸면서 큰 피해를 남긴 지 1년이 돼 간다. 지난해 태풍‧호우로 28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재산 피해액은 5728억원에 달했다. 최근 5년 평균(16.6명)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반면 재난 대응은 무기력했다. 주택‧상가‧지하철역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빗물이 뚫고 들어왔다.

올여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엘니뇨 현상’에 따라 예년보다 많은 비가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 올해 장마는 오는 25일 제주에서 시작할 전망이다. 중앙일보 취재팀은 장마철을 앞두고 지난해 비 피해가 심각했던 서울 강남·관악과 경북 포항 지역을 둘러보고 수해 대책을 점검했다. 그 결과 현장 복구는 더디기만 했다. 또 정부와 지자체가 쏟아낸 대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자연재해위험개선지구 지정 현황’과 같은 일부 통계는 정부-자치단체 간 엇박자가 났다.

김현서 디자이너

김현서 디자이너

지난해 전국 침수피해 서울에 60.5% 집중 

21일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국회부의장)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침수피해를 본 전국의 주택은 총 5만4624가구로 조사됐다. 이 중 지난해 피해를 본 주택이 60.5%(3만3051가구)에 달했다. 지난해 피해 주택 가운데 절반 이상인 1만9682가구는 서울에 있었다. 이는 2018년~2021년 피해 주택 1646가구보다 11배 이상 많은 규모다. 지난해 서울에 이어 경기(7135가구)·경북(4865가구)·인천(690가구) 순으로 피해가 컸다.

침수는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지난해 8월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어 9월 6일엔 경북 포항 시내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주민 7명이 숨졌다.

지난달 31일 이원재 국토교통부 제1차관과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매입임대 현장을 방문해 침수방지시설 설치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국토교통부

지난달 31일 이원재 국토교통부 제1차관과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매입임대 현장을 방문해 침수방지시설 설치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국토교통부

장마철 코앞 점검에 지적 사항 수두룩

정부와 전국 243개 광역·기초자치단체는 지난해 기록적인 비 피해 이후 인명피해 최소화를 핵심 목표로 대비책 마련에 나섰다.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지역을 점검‧관리하고, 수방시설 정비와 비상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지난달 1일부터 사흘간 대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합동점검도 했다. 그 결과 지적 사항 142건이 나왔다. 지자체가 사후관리‧상황전파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거나(22건) 구체적인 대피 기준‧장소조차 정하지 않는 사례(50건) 등이 쏟아졌다.

지난해 8월 8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대 방향 도로가 침수돼 있다. 뉴스1

지난해 8월 8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대 방향 도로가 침수돼 있다. 뉴스1

속도 안 나는 침수방지시설 설치 

정부는 이를 보완한 뒤 지난달 19일 여름철 자연재난(풍수해·폭염)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뒤늦게나마 피해가 컸던 반지하 주택 등을 새로 포함해 지정한 ‘인명피해 우려 지역’ 5400여곳을 집중적으로 관리하기로 했다. 국유지나 공공시설 등에 인명피해 우려 지역이란 안내문을 부착하고 점검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반지하 주택 등은 민원 발생을 우려해 표시하지 않는다. 집주인이 집값 하락을 걱정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지하로 빗물이 유입되는 걸 막을 차수판(물막이판)이나 탈출 때 방해물이 되는 고정형 방범창을 개폐형으로 바꾸는 침수방지시설 설치도 지지부진하다. 20일 기준 행안부가 파악한 지역별 침수방지시설 설치 대상 중 서울은 2만341곳 가운데 7945곳(39.1%)만 설치됐다. 경기도는 설치율 12%로 더딘 편이다. 인천은 설치율 44%를 보였다. 전국으로 보면, 물막이판 등이 필요한 취약지는 3만704곳이다. 이중 이미 설치가 완료됐거나 예정 중인 2만873곳을 제외한 9827곳(32%)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다.

서울시는 침수가 우려되는 반지하 주택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를 통해 사들이고 있다. 하지만 매입한 주택은 98가구에 불과했다. 올해 목표치(3450가구)의 2.8%수준이다. 상습 침수지역인 강남역·도림천·광화문 일대에 들어설 대심도 빗물 배수 터널은 4년 뒤에나 완공된다.

재난 대응 의구심…통계 관리도 허술

각 지자체는 지속적인 침수방지시설 설치와 빗물받이 청소, 예찰 강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예산 부족 등 문제로 실제 상황 발생 시 과연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기본인 통계 관리조차 허술하다. 현재 행안부가 관리하는 자연재해위험 개선 지구는 897곳인데 이는 지자체가 취합 중인 수치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서울의 경우 행안부 통계에 여러 곳이 누락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2019~2021년간 풍수해 때 인도 위 ‘흉기’가 되는 옥외광고물 추락·전도 사고는 한 해 평균 70건 발생했다. 하지만 새로운 내풍(耐風) 설계 기준이 담긴 옥외광고물 설치 표준 가이드라인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열심히 대비하고 있지만, (주민 민원이나 인력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9일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폭우로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다세대 주택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8월 9일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폭우로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다세대 주택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전문가 "물막이판 등 설치 강제" 의견 

해마다 오는 장마철이지만, 이상기후를 고려하면 제도를 정비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기후위기 대응 비영리단체 ‘플랜 1.5’의 윤세종 변호사는 “지금까지 겪었던 것보다 더 많이, 더 자주 풍수해 재난이 올 수 있다”며 “재난은 인명(人命)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예산‧인력 등을 우선순위로 배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겠다는 건 ‘위기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학과 교수는 “물막이판 등 안전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할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며 “현재 시스템만으론 앞으로 닥칠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 구체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우택 국회부의장은 “올해 장마가 심상치 않다는 예측이 있어 더욱 걱정되는 상황”이라며 “국민 안전을 단단히 지키기 위해 미비점을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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