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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김정은의 막다른 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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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지금 김정은은 핵 개발을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 핵 국가가 김일성 때부터의 유업이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고 생각할 듯하다. 한국전쟁 때 미국에 당한 트라우마가 북한 핵 개발의 동기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비극이다. 가만히 있는 북한을 미국이 침공할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기발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1950년대도 그랬고 지금은 훨씬 더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은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핵을 개발한 셈이다. 북한 내 소요사태 발생에 대비해 핵을 개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빌미로 외국군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제를 발전시켜 주민 지지를 얻는 것이 핵 개발보다 우선돼야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아닌가.

핵 개발 기회비용 1년 GDP 달해
핵과 경제 간 자원배분 왜곡으로
중·러 의존 심화, 주체사상 무너져
핵과의 결별 없인 북한 미래 없어

2016년 초로 돌아간다면 김정은은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그는 세 가지 치명적인 오판을 내렸다. 첫째, 이전의 여러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실효성 있는 제재를 만들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둘째, 미국이 제재안을 잘 만들더라도 중국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중국이 제재에 동참하더라도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이니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판단이 하나씩 무너지자 2017년 하반기에 김정은은 공황에 빠졌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명분 삼아 황급히 협상에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해 문재인과 도널드 트럼프라는 두 정상을 만나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 대통령은 무르기 짝이 없었고 미국 대통령은 얼렁뚱땅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노이 회담의 실패로 자신감이 흔들렸고, 지금은 경제 위기로 권력 유지마저 걱정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북한의 미약한 경제력은 그의 지나친 욕심을 뒷받침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핵 개발로 경제는 망가졌다. 2017년부터 작년까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이 경제에 끼친 기회비용은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70억 달러에 달한다. 2022년 북한의 국내총생산이 2016년보다 25% 감소했고, 제재를 받지 않았을 경우 이 기간의 경제성장률을 0%라고 가정한 추정치다. 1년 국내총생산에 버금가는 돈을 핵 개발로 탕진한 셈이다. 여기에다 핵 및 미사일 개발과 발사에 직접 지출한 금액까지 합치면 북한 수준으로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치렀다.

한미정상회담은 김정은을 더욱 좌절시켰다. 북한의 핵 개발이 ‘베이비 스텝’이라면 한미는 ‘빅 스텝’을 밟고 있다. 한미 정상이 합의한 ‘핵협의그룹(NCG)’이 그렇다. 북한이 자원을 아무리 많이 투자해도 북핵은 미국 핵을 감당할 수 없다. 경제 규모가 한국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군비경쟁을 벌이려 한다면 이는 자멸에 가깝다. 더욱이 한국의 방위산업은 외화 수입원이지만 북한은 핵과 탄도미사일로 외화를 벌 수 없다. 작년 한국의 방위산업 수출액은 170억 달러로서 북한의 한 해 국내총생산과 비슷하다. 이처럼 남한은 수출로 취득한 외화를 무기 개발에 재투자할 수 있는 반면 북한은 여기저기서 어렵게 번 외화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쏟아부어야 한다.

김정은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앞으로 가자니 장애물에 막혀 있고 돌아가려니 너무 먼 길을 왔다. 그의 마지막 기대는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일 것이다. 하지만 자립·자강을 위해 필요하다던 핵이 북한을 중·러에 의존해야만 생존 가능한 수준으로 내몰았다. 김일성이 중·소(中·蘇)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연안파(중국파)와 소련파를 숙청하고 만들었던 주체사상을 김정은의 핵이 파괴한 형국이다. ‘핵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중·러와 북한의 ‘편의에 의한 결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의 러시아, 한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히 얽혀 있는 중국이 한국보다 북한을 더 필요로 할까. 세계 10대 강국에 속하는 한국은 자력으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러나 핵을 쥔 북한은 자력으로 살 수 없다.

김정은은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자원 투입 면에서 핵과 경제의 균형이 무너진 현 상태는 지속하기 어렵다. 그의 권력 유지 시각에서 보더라도 핵 개발에 쓰이는 자원을 경제로 돌려야 체제 안정을 기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제재 해제와 경제 개발, 그리고 북미 수교 및 평화 협정과 교환하는 방식의 해결책 외엔 답이 없다.

비핵화는 좁은 길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북한의 밝은 미래는 비핵화만이 열 수 있다. 한반도 운명의 절반도 여기서 결판난다. 북한의 선택지는 크게 좁아졌다. 김정은은 자신감을 잃었으며 핵 개발을 뒷받침하는 경제는 빈사 상태다. 국제 정세에서 요행수를 찾으려 하겠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핵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핵이 파괴한 북한 목록은 더 길어질 것이다. 그 목록의 맨 마지막엔 그의 이름이 기록될 수도 있다.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