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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말의 정치학] 7.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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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라 국(國)자에는 네모난 口자가 두개나 들어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기를 뜻하는 과(戈)가 있다. 국민 전체를 지켜주는 국경의 큰 성벽과 개개인의 집(家)을 보호하는 작은 울타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나라의 집 국가(國家)이다.

그런데 정보.돈.물건이 국경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세계화가 되면서 두 성벽의 의미는 날로 의미를 잃어간다. 김영삼 대통령 때 정치구호를 국제화에서 갑자기 세계화로 옮긴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이 확실치 않아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가 된다"는 농담으로 끝이 난 셈이다.

세계화(글로벌리제이션)란 무엇인가. 인터넷상에도 세계화를 정의한 조크가 등장했다.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가 이집트인인 남자친구와 독일제 벤츠를 타고 프랑스 파리의 터널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그것이 바로 세계화라는 것이다.

거기에 또 차를 몬 운전사는 벨기에인이고 과속의 원인은 일제 혼다를 탄 이탈리아의 파파라치 때문이다. 그 뉴스를 IBM 호환 PC에 탑재된 빌 게이츠의 MS 윈도를 대만산 마우스로 클릭해 한국제 모니터로 읽은 네티즌이 네덜란드산 조화를 보낸다. 그리고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캐나다인이라는 것이다.

그냥 웃어넘길 농담이 아니다. 한 여인의 죽음이 전 지구와 관련돼 있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는 글로벌리즘의 심각한 모순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표층은 나라를 초월한 것이지만 그 비극의 내면은 영국 왕실의 특수한 로컬문화다.

이러한 모순과 아이러니를 우리라고 피해갈 수는 없다. 한국인은 내 마누라라고 할 때에도 우리 마누라라고 할 만큼 '우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우리를 지구 규모로 확대하면 글로벌리즘이 된다. 하지만 '우리'에 꼬리가 붙어 '우리끼리'가 되면 갑자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월드컵 대회에 세계에 비친 한국도 '열린 우리'와 '닫힌 우리'의 두 얼굴이었다. 그래서 헷갈린 외국 언론 가운데는 "월드컵에 월드는 없고 한국만 있었다"는 칭찬 반, 비아냥 반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 미녀응원단이 시선을 모았던 대구의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는 핵 문제로 6자회담을 앞둔 때라 외국 여론은 한결 민감했다. 개회식에서 미국과 일본 선수단이 입장할 때 북한 응원단이 일제히 침묵하는 장면을 TV에 담아 내보내기도 했다.

점 하나 잘못 찍으면 '미녀'는 '마녀' 가 되고 '민족'은 '만족'이 된다. 마찬가지로 말하기에 따라 글로벌리즘은 사대주의가 되기도 하고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바뀌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글로벌리즘의 시대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닫힌 우리'에서 대담하게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반세계화 운동마저 세계연대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 오늘의 정치 상황이다. 끼리끼리의 도당정치가 물러나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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