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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자산 450조' 묶은 서방 "우크라에 쓸 것"…열받은 러도 맞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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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과 러시아가 각자 동결했던 자산을 놓고 장외전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동결한 러시아 자금을 우크라이나 재건에 쓰겠다며 최근 들어 관련 논의와 입법을 서두르고 있고, 러시아는 헐값에 서방 기업의 자산을 국유화하는 조치로 맞불을 놓는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라 관련국들의 재정난이 심화하자 나온 고육지책이란 풀이도 나온다.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결한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사용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환전소 근처에서 젊은이들이 유로화 기호가 표시된 스크린을 가리키는 모습. EPA=연합뉴스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결한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사용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27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환전소 근처에서 젊은이들이 유로화 기호가 표시된 스크린을 가리키는 모습. EPA=연합뉴스

1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등에 따르면 최근 유럽연합(EU) 내에선 대(對)러시아 제재로 동결된 자금으로 얻은 이자 수익 등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사용하기 위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앞서 지난 15일 미국 의회에선 동결된 러시아 자금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법안이 나왔다.

현재 미국ㆍEUㆍ일본 등 서방 진영이 동결한 러시아중앙은행의 외환은 3000억 달러(약 384조원)에 이른다. 이 외에 러시아 신흥재벌(올리가르히)의 자산 580억 달러(약 74조원)도 서방측 금융기관에 묶여 있다.

세계은행(WB)과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난 3월 추산한 우크라이나 내 인프라 등의 재건과 복구 비용은 4110억 달러(약 525조원)에 육박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공방전을 지속하면서 이 같은 재건 비용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이달 초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州)의 카호우카 댐이 붕괴하는 등 상황은 악화 일로다.

지난 7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의 붕괴한 카호우카 댐 위로 범람한 물이 흐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7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의 붕괴한 카호우카 댐 위로 범람한 물이 흐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제공 등 각종 지원을 계속해온 EU 주요국들의 입장에선 재원 마련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에 철군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이 같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카드로 러시아 동결 자금 활용안이 떠올랐다.

닛케이에 따르면 러시아중앙은행의 자산 1800억 유로(약 252조원)를 보유한 세계 최대 국제예탁결제기관인 유로클리어(벨기에 브뤼셀 본사)가 올 1분기 동결 자금을 재투자해 벌어들인 수익만 7억3400만 유로(약 1조268억원) 수준이다. 앞서 벨기에 정부는 지난달 이 같은 이자로 발생한 추가 세수 9200만 유로(약 1290억원)를 우크라이나 지원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올리가르히 재산도 몰수

미국에선 보다 고강도 조치가 검토되고 있다. 미 상원의 여야 의원들은 지난 15일 미국 당국이 동결한 러시아중앙은행 등의 자산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법안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런 자산을 몰수해 우크라이나에 양도할 권한을 갖는다.

전쟁 범죄 등에 연루된 일부 올리가르히의 재산도 몰수 대상에 올랐다. 일례로 러시아의 미디어 재벌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할 당시 현지의 친러시아 반군에 자금을 댄 것으로 드러나면서 540만 달러(약 69억원)의 재산이 동결돼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크라마토르스크에서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손된 주택지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의 크라마토르스크에서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파손된 주택지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캐나다 정부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FC의 전 구단주이자 러시아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 소유의 회사 자산 2600만 달러(약 334억원)에 대해 몰수 절차를 밟고 있다. 캐나다는 지난해 관련법을 제정하는 등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이 같은 동결 자산을 사용할 근거를 이미 마련해놓은 상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국제법 위반 소지가 커서 논란이 예상된다. 어떤 국가가 행정 집행으로 다른 국가의 자산을 강제 몰수하는 것은 국제법상 ‘주권 면제’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EU가 동결 자금을 건드리지 않고 이자 수익만 활용하는 우회 방안을 논의 중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국제법학자인 안토니우스 차나코프로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한 국가의 자산을 동결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가역적인 것”이라며 “(국제법상)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 동결은 할 수 있어도 몰수해서 (전용하는 것은) 안 된다”고 닛케이에 말했다.

푸틴, 자산 압류 법안 서명

당장 러시아도 맞대응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내 잔류 자산을 압류하는 법안에 이달 초 서명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번 법안에는 러시아 정부가 서방 기업들의 자산을 매우 낮은 가격에 사들여 매각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내용이 포함됐다. 사실상 국유화를 의미하는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달 초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내 자산을 압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다. AP=연합뉴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달 초 서방 기업들의 러시아 내 자산을 압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다. AP=연합뉴스

또 이를 사들일 업체에서 외국인 투자자를 완전히 배제하도록 하는 등 서방 기업들의 출구를 틀어막는 방향으로 법안은 꾸려졌다. 러시아 당국은 매각 과정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국고로 환수해 전쟁 자금 등에 쓰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들어 러시아의 재정 적자가 420억 달러(약 54조원)로 늘어난 상황에서 재정을 확충하고 서방의 제재에 맞설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편인 셈이다.

앞서 러시아는 지난 4월 독일 가스회사인 유니퍼와 핀란드의 국영 전력기업인 포텀 등 서방 에너지기업의 러시아 내 합작 법인 지분을 국유화했다. 이와 관련, 익명을 요구한 서방 기업의 한 고위직 임원은 FT와 인터뷰에서 “서방의 원자재 기업들이 주요 타깃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관련 노하우가 필요한) IT(정보기술) 기업의 경우, 러시아가 직접 운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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