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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우리 시대의 괴짜 ‘청자 덕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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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건희(1942~2020) 삼성 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 점이 국가에 기증된 것이 바로 2021년 4월 말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아도 규모와 수준 면에서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세기의 기증이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이건희 회장에 앞서 수집을 시작한 사람은 삼성 창립자이자 그의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일찍이 대구 시절부터 집 주변을 동양화와 서예로 가득 채웠고, 후에 국보로 지정된 가야금관과 청자진사주전자 등 걸작을 모아왔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청자진사주전자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꼈는지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 2층 전시실에 30㎜ 방탄유리로 쇼케이스를 만들도록 지시한 일화로 유명하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1976년 일본경제신문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지요. “나의 소장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유물은 ‘청자진사주전자’나 ‘청자상감운학모란국화문매병’ 등이다. 자랑하기는 그렇지만,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할 정도이다.” 그는 자타 공인 청자 매니어였습니다.

청자 오리뚜껑 연화형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전반, 높이 34.4㎝, 향로 높이 17.3㎝. [사진 작가 남기용]

청자 오리뚜껑 연화형 향로. 고려시대 12세기 전반, 높이 34.4㎝, 향로 높이 17.3㎝. [사진 작가 남기용]

이병철 회장급도 아니면서 청자를 모으는 사람이 요즘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런 점에서 서울 안국동 도화서길 디원에서 ‘이아(利我): 고려의 선과 청자’ (7월 20일까지)는 미술계 사람들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놀라운 전시입니다. 한 수집가가 모아온 고려청자 200여 점이 한자리에 나왔는데요, 박물관 하나가 통째로 들어온 듯한 큰 규모에 다채로운 구성이 놀랍습니다.

컬렉터 주재윤(셀라돈 대표)씨는 뜻밖에 40대 중반입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10년 전 우연히 청자 한 점을 선물 받고 너무 설레서 잠을 다 설쳤다”며 “이후 청자에 미쳐 살았다”고 했습니다. 강릉에 사는 그가 “청자가 눈앞에 아른거려” 밤을 꼬박 새우며 부안 청자박물관이나 고려청자박물관으로 달려간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지요. 청자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해 관련 고서적도 미친듯이 사모으며 읽었고요. 한약 관련 사업을 하는 그에게 청자는 이를테면 ‘돈 먹는 하마’와 같았습니다.

한 고미술 관계자는 “다들 현대미술에 시선이 쏠린 시대에 청자를 모은다는 건 ‘본전’ 생각하면 절대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군요. 40년 넘게 고미술을 수집해온 70대 소장가도 “청자 하나에 집중하면서도 작품이 다양하게 잘 갖춰져 있어 놀랐다”면서 “수집가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모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미술계에 아주 귀하고 소중한 컬렉터 한 명이 탄생했다”고 말했습니다.

주씨는 “좋은 것은 나누고 함께해야 커진다고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다”며 “언젠가 강릉에 청자박물관을 여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인연’ ‘열정’ ‘정성’ ‘공유’라는 키워드로 불쑥 다가온 우리 시대의 ‘괴짜’ 청자 컬렉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