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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컨 “北 도발 관련 中 역할 요구”…친강 부장 워싱턴 방문키로

중앙일보

입력

중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이어진 중국 인사들과의 회담에서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책임 있는 영향력 행사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19일 중국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19일 중국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블링컨 장관은 19일 베이징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회담에서) 북한의 점점 더 무모해지는 행동과 언사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국제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북한이 책임감 있게 행동함으로써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도록 독려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은 북한이 대화에 나서고 위험한 행동을 중단하도록 압박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며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도발을 막고 북한을 국제 외교 무대로 이끌기 위한 중국의 역할을 요구했다.

블링컨 장관은 방중 기간 미ㆍ중 양측이 양국 관계 안정화 필요성에 동의했다고도 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 모두 양국 관계를 책임감 있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그렇게 하는 것이 양국과 전 세계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어 “베이징에 와서 양국 고위급 채널을 강화해 이견이 있는 분야에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초국가적 공동 과제에 대해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분야에서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을 논의했다”며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요한 대화를 나눴고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친강 외교부장과도 솔직하고 실질적이며 건설적인 논의를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저는 고위급에서 직접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서로의 차이를 책임감 있게 관리하고 경쟁이 갈등으로 치닫지 않도록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고 중국 측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낸시 펠로시 전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정찰풍선 격추 등을 겪으며 최근 수년간 악화일로를 걸었던 미·중 양국이 일단은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마련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양국이 대만 등 지역 안보 문제와 반도체 등 첨단기술 수출통제 등 첨예한 현안을 놓고는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지만, 오해와 오판으로 인한 무력 충돌 등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상황 관리의 필요성에는 공감대를 이뤘다.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블링컨 장관 방중 일행을 맞은 자리에서 “중국은 항상 중·미 관계가 건강하고 안정되기를 바라며 두 강대국이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고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미국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했던 합의를 견지해 중·미 관계가 안정되고 좋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양국 관계 정상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동시에 상호 존중에 기반해 관계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발언이다. 시 주석이 베이징에서 미 국무장관을 만난 건 2018년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 이후 5년 만이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블링컨 장관 일행을 만나 “중국은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며 미국에 도전하거나 미국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중국을 존중해야 하며 중국의 정당한 권익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블링컨 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보낸 인사를 전하며 “바이든 대통령은 미·중 양국이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고 양자 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미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고 중국 외교부는 전했다.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으며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고 중국과 충돌할 의사가 없다”고도 했다고 한다. 시 주석 역시 바이든 대통령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시 주석은 두 개의 긴 테이블에서 블링컨 장관 등 미국 측 일행, 그리고 왕이 위원과 친강 부장 등 중국 측 인사들이 마주 앉은 가운데 상석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듯한 형태로 회동을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식의 자리 배치는 미국 내 의전서열 4위인 국무장관과의 만남에선 극히 드문 일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에서 두번째)과 회담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이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에서 두번째)과 회담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특히 2018년 6월 마크 폼페이오 당시 미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과 만났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당시엔 외교 관례에 따라 시 주석과 폼페이오 장관이 작은 탁자를 가운데 둔 채 나란히 배치된 두 개의 의자에 앉아 면담했다. 상호 대등한 관계의 모양새로 비춰졌는데, 이번엔 시 주석이 마치 상석에서 회의를 관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시하면서 미국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암묵적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시 주석이 참여한 회담은 현지시간으로 오후 4시 34분에 시작해 5시 9분까지 약 35분간 진행됐다고 미 국무부 관계자는 말했다.

양국 간 긴장 고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대만 문제와 관련해 블링컨 장관은 “중국이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도발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며 ‘하나의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 우리는 대만이 스스로 방어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포함해 대만 관계법에 따른 우리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대만을 둘러싼 미ㆍ중 입장차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블링컨 장관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제재 이후 미국 기업이 갖는 우려 및 양국의 경제 정책과 관련된 의견도 교환했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이번 회담에서 우리의 대중(對中) 접근 방식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디커플링’(분리)과 ‘디리스킹’(위험 제거)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최근 말했듯이 우리가 중국과의 모든 무역과 투자를 분리하고 중단하는 것은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는 불안정한 공급망에 투자하고 미국의 핵심기술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경쟁의 장을 추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 미국 안보에 필요한 경제적 조치는 계속 취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블링컨 장관은 방중 기간 중국 신장, 티베트, 홍콩 등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하고 중국에 구금된 미국 시민들의 억류 해제 문제도 제기했다. 또 마약성 강한 진통제로 미국에서 사회 문제화된 펜타닐을 구성하는 화학물질의 제조를 차단하기 위한 양국 실무그룹 구성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앞으로 몇 주 동안 미국 고위 관리들이 중국을 추가로 방문할 것”이라며 “친강 부장의 워싱턴 방문을 초청했고 상호 적절한 시기에 방문하기로 동의했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전 있었던 블링컨 장관과 왕이 위원 간 회담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고 한다.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 위원은 미국의 대중국 독자 제재 철회와 함께 첨단 반도체 등 전략산업 영역에서의 대중국 봉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왕 위원은 과장된 ‘중국 위협론’을 중단하고 중국에 대한 ‘불법적 독자제재’ 철회,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압박 포기,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 금지 등을 요구했다고 중국 외교부는 전했다.

또 대만 문제와 통일에 대해 “타협하거나 양보할 여지가 없다”며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진정으로 준수하고 중국의 주권과 영토의 완전성을 존중하며, 대만 독립에 명확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중국의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대해 블링컨 장관은 미국이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 확정한 의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중국 정부는 전했다.

전날 열린 블링컨 장관과 친강 부장의 회담을 놓고는 미·중 모두 “솔직하고 건설적인 회담이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두 사람은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약 5시간 반 동안 회담한 뒤 다시 2시간 동안 업무 만찬을 함께 하는 등 총 7시간 반 동안의 마라톤 협의를 가졌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8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 걸어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8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 걸어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편 중국의 소셜미디어 웨이보에서는 블링컨 장관이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을 때 레드카펫 환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2012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장관은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을 때 레드 카펫 위를 걸었고, 지난 4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도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다만 2018년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은 레드카펫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중국국제문제연구소의 쑤 샤오후이는 “우리는 미국이 에티켓과 의전에 대해 장난칠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무례하지 않지만 미국이 우월하게 보이도록 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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