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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의 히노키는 뭐고?"…삼바 신화, 그렇게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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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뒤 이을 성장동력 찾기

삼성바이오로직스 송도캠퍼스 제4공장.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 생산 규모다. 김경록 기자

삼성바이오로직스 송도캠퍼스 제4공장. 단일 공장 기준 세계 최대 생산 규모다. 김경록 기자

“수종? 삼성의 수종이 뭐고?”

1993년 여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직후 사장단 회의. 이 선대회장이 ‘수종(樹種)’이라는 낯선 단어를 꺼내자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한 삼성 전직 사장의 회고다.

“일본에서는 잘 키운 히노키는 결이 곧고 단단해 일식집 도마나 온천탕 목재(히노키탕)로 쓰여 굉장히 비싼 값을 받는다는 거예요. 처음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지금으로부터 20~30년 뒤에도 먹고살 수 있도록 삼성만의 히노키를 찾아서 미리 심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던 거지요.”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이후 ‘삼성의 히노키는 어디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 신수종(新樹種)에 대해 매일 밤늦은 토론이 이어졌다. 2007년 10월 19일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본관. 전략기획실 산하에 태스크포스(TF) 하나가 조용히 꾸려졌다. 팀 이름은 ‘신수종사업발굴TF’. 당시 초대 신수종사업발굴TF 팀장을 맡았던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삼성 종합기술원장 시절 갑자기 (회장 비서실에서) 발령이 났다면서 통보해 왔다”고 기억했다. 임 사장 외에도 김태한 삼성토탈 전무와 임석우 삼성전자 상무, 고한승 종합기술원 상무(당시 직책)가 호출을 받았다. 삼성의 신수종은 다름 아닌 바이오사업이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2011년 4월 22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닻을 올렸다. 하지만 바이오 업계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던 삼성에 일을 맡기는 제약사들은 없었다. 김태한 사장이 직접 미국과 유럽 주요 제약사를 발로 뛰며 영업활동을 시작했지만 대부분은 문전박대당하며 면담조차 할 수 없었다. 삼성의 손을 잡아준 곳은 글로벌 5위 제약사 바이오젠이었다. 바이오젠은 2012년 삼성과 합작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설립하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바이오젠의 의약품 위탁생산을 삼성이 해내자 모더나, 로슈, GSK 등 글로벌 거대 제약사들로부터 잇따라 일감을 받았다.

최근 바이오젠은 보유하고 있던 삼성바이오에피스 지분을 모두 팔아 투자이익을 실현했지만 양사의 협력 관계는 여전히 굳건하다. 바이오젠은 삼성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유럽 등에 유통·판매하면서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지난달 크리스토퍼 비에바허 바이오젠 최고경영자와 만나 양사 동맹이 여전히 굳건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지난달 31일 오전에 찾은 인천시 송도 삼성바이오로직스 제2공장. 공장 내부에는 1만5000L 규모의 거대한 배양기 10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언뜻 맥주 양조장 같지만 효모 대신 세포를 키운다는 점이 다르다. 이 거대한 배양기에서 자란 세포가 사람을 살리는 바이오의약품의 원료가 된다. 세포 배양과 실험은 모두 클린룸에서 이뤄진다. 의약품은 사람 몸에 직접 들어가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나 미세한 오염도 허용되지 않는다. 반도체 공장에서 갈고닦았던 삼성의 노하우가 빛을 발했다. 덕분에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생산 수율(원재료 대비 완제품 생산 비율)은 업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처음으로 매출 3조원의 벽을 돌파했다. 영업이익도 1조원에 육박한다. 올해 1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1%, 8.7% 늘었다. 10년 전 송도에 심은 수종은 어느새 거목(巨木)으로 자란 셈이다.

지난 3월 삼성전자는 또 한번의 미래 준비에 나섰다. 정부가 2042년까지 용인에 조성하는 710만㎡ 규모의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에 향후 20년간 300조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다시 한번 히노키를 심는 셈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그동안 없었던 사업을 새롭게 도입하는 방식으로 ‘새로 나무를 심는’ 신수종 사업을 밀어붙였다면, 이재용 회장은 기존 사업을 조율해 미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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