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뿌리치는 미국을 최고의 동맹으로 만든 이승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6·25전쟁 하루 전 군 수뇌부는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했고, 만취했다. 육군참모총장은 숙취 상태에서 전쟁 발발을 보고받았다. 육사 8기 단체 회고록은 “각 분야별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던 전투력 약화 작업은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예비역 대장 이형근은 “육군 지휘부에 적과 내통한 인사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침(새벽 4시) 사실을 보고받은 것은 6시간30분이나 지난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일요일이었는데 국방장관이 주말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을 떠나면 한국인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면서 ‘사수(死守)’를 주장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서울에서 시가전을 펴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 사수’를 결의했던 한국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를 결정했다. 주객이 전도됐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승만의 삶과 국가』 오인환)

6·25 때 군 수뇌부 총체적 무책임
이승만 홀로 위기대처 능력 발휘
대책 없는 휴전 반대 월남화 막아
강대국에 할 말 해야 생존한다

망국으로 향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완벽한 위기대처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26일 새벽 3시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해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고 호통쳤다. 장면 주미 한국대사에게 “적이 문앞에 와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시오”라고 했다. 남침을 워싱턴과 유엔의 긴급 현안으로 부각시켰고, 미 의회 의결도 없이 조기 참전을 이끌어냈다. 군 수뇌부의 강권으로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서울을 탈출했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과오를 제외하면 초인적 전시(戰時)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전선을 누비면서 “우리가 계속 밀고 쳐 올라가야 우방의 원조도 꾸준히 들어올 것이고, 적군을 물리치고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맨손으로 싸우는 한국 장병에게 무기를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다. 외신기자와 인터뷰했고, 외교 문서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직접 작성하는 1인 외교를 펼쳤다. 독립운동가로 쌓아 온 40여 년의 대미 외교 경험과 고급영어 구사 능력, 애국심과 두둑한 배짱이 무기였다. 유사시 부부가 자결(自決)하기 위해 권총을 침실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쉴 새 없이 항전 의지를 알렸다(『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우크라이나의 영웅 젤렌스키 부부의 역사적 롤 모델이다.

‘미국의 시저’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이 ‘크리스마스 공세’(11월 24일~12월 3일)에 나섰지만 잠복해 있던 중공군에게 대패했다. “한국에서 중공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철수를 논의했다. 군 수뇌부는 “중국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것이 명백하다면 빠른 시일 안에 철수시키자”고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인들이 살육당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애치슨의 의견에 찬성했다. 서울에선 “미국이 한국을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때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죽기로 결심했다”고 정치고문인 올리버 박사에게 밝혔다.

트루먼 행정부는 1951년 초 휴전 방침을 정했다. 전쟁을 계속하려면 정규군을 20만 명 늘리고 연간 9억 달러의 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통일 한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휴전은 수용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사흘치 공격용 탄약밖에 없으면서도 소련·중공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7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에 잠정 합의하자 다음 날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한국전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친구가 적으로 변했다”며 격분했다. 이승만 제거 작전을 검토했으나 의회가 ‘반공투사 이승만’ 축출에 반대하자 물러섰다. 결국 로버트슨을 특사로 보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원조,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강화 등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했다. 대신 이승만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은 네 차례나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가 1973년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패망한 월남의 운명이 되지 않았을까.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미워했지만 역량은 높이 평가했다. 프랑스인에게 “월남에 필요한 인물은 또 한 사람의 이승만”이라고 극찬했다.

이승만은 ‘전략적 가치가 없는 한국’을 손절하려던 ‘배신자’ 미국과 싸워 최고의 동맹관계를 맺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제2의 이승만’이 나올 수 있을까. 70년 전의 거인은 “강대국에도 할 말을 하는 용기, 동맹과 우방의 신뢰를 받는 외교 원칙으로 무장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서로 “내게 베팅하라”고 우리를 압박한다. 이 위험천만한 혼돈의 계절에 여전히 지구상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을 안고 있는 한국의 생존에 필요한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