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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수능 ‘킬러 문항’ 소동에서 이승만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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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대학입시 얘기가 나오면 죄인의 심정이 된다. 10여 년 전 둘째가 수능에서 8과목  8색(色) ‘킬러 문항’과 씨름해 원하는 대학의 2배수 합격자로 선발됐다. 논술고사 날 동행했다. 대학 캠퍼스를 한바퀴 도는 시내버스에 올라탔는데, 아뿔싸! 엉뚱한 곳에 내리는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아들은 30분 지각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입실허가는 받았지만 최악의 조건에서 황당한 ‘킬러 문제’들을 만나 악전고투했다. 부자(父子)는 아주 오랫동안 악몽을 꾸었다.

요즘도 ‘킬러(초고난도) 문항’이 화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괴물”(이주호 교육부총리의 표현)에 선전포고하면서 용감하게 수능 개혁에 나섰다. ‘사교육 카르텔’과 ‘일타강사’를 겨냥했다. “제발 틀려다오”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최대한 꼬아 만든 ‘킬러 문항’은 어떻게든 서열을 정하기 위한 꼼수 억지 문제다. 해당 분야 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하니 수험생들의 고통은 어떨까.

‘킬러’ 전멸해도 사교육 여전할 것
수능 수술…대학에 입시 자율권을
챗GPT 시대 세상 바꿀 창의 절실
이승만 ‘교육 선견지명’ 숙고하길

윤 대통령은 킬러 문항 출제가 “약자인 아이들 데리고 장난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대통령발 ‘공정 입시’의 명분은 연간 26조원으로 치솟은 사교육비 경감이다. 국세청은 대형 입시학원의 장부를 뒤지고 있다. 11월 수능에서는 ‘킬러 문항’이 전멸할 것이다. 수험생들은 환호작약(歡呼雀躍)할 것인가.

그러나 악명 높은 이 나라의 입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차하면 역풍으로 정권이 흔들릴 수 있다. 정유라 이화여대 입시비리가 박근혜 몰락의 결정타였다. 문재인 정권이 추락한 것도 조국 자녀의 입시비리 때문이었다. 두렵다면 수험생 엄마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강력한 모성(母性)으로 무장한 엄마는 어설픈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입시 도사(道士)다. 사소한 변화도 예민하게 포착해 기민하게 반응한다.

엄마들은 수능에 메스를 들이댄 윤 대통령의 의도에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그러나 시기에는 불만이다. 수능을 몇 년간 뼈빠지게 준비해 왔는데 불과 5개월 앞두고 출제기준이 급변침하면서 입시전략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등교육법 34조5항도 수능 전형의 기본방향과 출제형식은 4년 전에 예고하도록 하고 있다. ‘킬러 문항’ 시비로 사망선고를 받은 6월 모의평가 결과는 이제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이걸 기준으로 수시를 지원하는 수험생들은 멘붕 상태다.

대통령은 6월 모평 국어에 ‘킬러 문항’이 있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교육부가 공개한 국어 ‘킬러 문항’ 2개의 정답률은 36%를 넘었다. 만점자도 1492명으로 전년 수능 371명의 4배나 됐다. 수능 커뮤니티에는 “읽으면 다 풀 수 있는 문제던데, 왜 대통령이 난이도를 운운하지”라는 글이 올라왔다. ‘킬러 문항’의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불안한 학부모들은 ‘공정 수능’의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성기선 전 교육과정평가원장은 “정밀하고 전문적인 수능 출제 시스템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정치적 입김을 타면 붕괴될 수 있다. 올해 수능이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킬러 문항’이 사라지면 교육당국이 큰소리친 대로 사교육비가 줄어들까. 그렇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어떻게든 40만 수험생을 한 줄로 세워야 하기 때문에 다수의 ‘준 킬러 문항’ 출현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불안해진 수험생은 사교육에 더 의존하게 된다. 실제로 ‘물수능’ 때에도 사교육비는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렇다면 ‘킬러 문항’과의 전쟁은 명분도, 실익도 없고 불확실성과 혼란만 초래한 것이 아닌가.

지금은 대통령이 ‘킬러 문항’과 씨름할 때가 아니다. 대입 차원을 넘어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시기다. 어떤 난제에도 척척 대답하는 챗GPT가 널려 있는 인공지능(AI) 시대가 아닌가.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숙련공은 필요 없다. 세상을 바꾸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인재가 환영받는다. 수능 5지선다형으로 ‘한 줄 세우기’는 시대의 메가트렌드와 불화한지 오래됐다. 퇴행적 수능을 폐지하거나 자격고사로 활용하고, 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안을 공론화해야 한다.

사교육 기세에 눌린 공교육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실력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학벌사회, 불평등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혁파하는 사회개혁이 나와야 한다. 경쟁·성공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관용·연대·평등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킬러 문항’ 소동이 이런 필요성을 환기시켰다면 윤 대통령은 성공한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로 입에 풀칠하던 시절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시작했다. 임기 내에는 성과를 누릴 수 없는 정책이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 중에도 ‘특별요강’을 발표해 피난지에서 학교를 열었다. 남녀와 계층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교육으로 민주주의와 고도성장이라는 문명국가의 초석을 깔았다. 백년 뒤를 내다본 거인(巨人)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윤 대통령도 ‘킬러 문항’을 넘어서 교육을 통한 국가 백년대계를 선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