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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 중국…주중대사 초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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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중국 외교부가 정재호 주중 대사를 불러들여 한국 외교부가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를 초치한 데 항의했다고 11일 밝혔다. 싱 대사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나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내정간섭 수준의 발언을 한 것에 우리 정부가 엄중히 경고하자 ‘대사 초치’로 맞불을 놓았다.

중국 외교부는 “눙룽(農融)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가 10일 정재호 대사를 약견(約見, 회동을 약속하고 만남)하고 한국 측이 주한 중국대사와 이재명 한국 야당 대표의 교류에 부당하게 반응하고 항의한 데 엄중한 우려와 불만을 표명했다”고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중국은 아시아 역내 양자관계를 담당하는 쑨웨이둥(孫衛東) 부부장(차관)이 아닌 아시아 다자관계를 담당하는 눙 차관보를 내세워 한국을 대하는 격을 낮췄다.

이날 만남에서 눙 차관보는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 각계 인사와 광범하게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은 그의 직책이며, 목적은 이해를 증진하고 협력을 촉진하며 중·한 관계의 발전을 수호하고 추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외교결례 뒤 되레 반한 공세…‘전랑외교’ 거칠어졌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어 “한국은 최근 중·한 관계 문제의 소재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고 진지하게 대처해 중·한 수교 공동성명의 정신을 확실히 준수하고 중국과 마주 보고 가며 더불어 양국관계의 건강하고 안정된 발전을 추동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이는 지난 9일 장호진 외교부 제1차관이 싱 대사를 초치한 데 맞불 성격으로 싱 대사의 ‘베팅’ 발언은 두둔하면서 양국관계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는 취지다. 앞서 지난 4월 장 1차관이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참견을 허용하지 못한다(不容置喙 ·부용치훼)” 발언과 관련해 싱 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초치했을 때보다 한발 나아갔다. 당시 중국은 밤늦게 쑨웨이둥 부부장이 긴급 요청으로 정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대만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우려를 전달했고, 통화 사실은 사흘 뒤인 23일 발표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은 11일 보도자료를 내고 “정재호 대사는 10일 중국 측 요청으로 중국 외교부 눙룽 부장조리를 면담해 주한 중국대사가 8일 우리나라 야당 대표와의 회동 계기로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비상식적이고 도발적이며 사실과 다른 언행을 한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엄중한 항의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발표문에 중국 측 입장만 밝혔을 뿐 정 대사의 발언이 언급되지 않은 데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이날 주한 중국대사관 관계자도 카카오톡을 통해 일부 내신기자들에게 “(싱 대사의) 베팅 이야기는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말”이라며 “한국 정부의 입장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왜 한국 정부 공격으로 규정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한 외국대사관 중 한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을 운영하며 자국 정부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국가는 중국이 유일하다.

중국 관영 신화사도 10일 싱 대사가 이재명 대표에게 했던 ‘베팅’ 발언을 두둔했다. 신화사가 운영하는 웨이신(微信, 중국판 카카오톡) 공식 계정인 ‘뉴탄친(牛彈琴)’은 이날 ‘주한 중국대사가 남긴 이 말은 실로 일침견혈(一針見血, 정곡을 찌르는 말)’이란 글을 싣고 “현재 중국이 진다는 데 베팅한 사람은 이후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뉴탄친은 “흥미롭게도 한국은 정확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신이 났다”며 싱 대사 초치를 비아냥 투로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국아, 한국아, 많은 일이 서너 번 생각한 뒤에 행동해야 한다. 때가 돼서 또 후회하지 말라”고 맺었다.

중국은 정부 관계자가 ‘선을 넘은’ 발언을 한 뒤, 한국의 항의에도 논란이 된 발언을 두둔하거나 관영 매체 등을 통해 확대·재생산하는 패턴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4월에도 왕 대변인의 ‘부용치훼’ 발언에 한국 외교부가 싱 대사를 초치하자 중국은 한 달여간 정부 차원에선 극단적 표현을 아낀 채, 관영 매체를 동원해 “한국 외교의 국격이 산산조각났다”며 반한 여론을 조장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지난달 4일 “저급한 표현으로 우리 외교 정책을 치우친 시각으로 폄훼했다”는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중국은 “매체의 관점은 중국 국내의 민의를 반영한다”(왕 외교부 대변인, 지난달 8일)며 거들었다.

이지용 계명대 인문국제대학 교수는 “한국 내정에 간섭하는 도발적 언행을 통해 내부 충성 경쟁을 위한 실적을 쌓고, 한국의 정치 지형을 교묘히 이용해 야당과 함께 윤석열 정부를 때리려는 중국의 공세가 한동안 계속할 수 있다”며 “다만 이런 행태는 안 그래도 심각한 반중 감정을 더욱 자극할 뿐이며 중국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야당을 더욱 수세로 몰 것”이라고 말했다.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외교 사절이 주재국 외교 전반을 깎아내리며 ‘반드시 후회한다’고 이야기하는 건 한국 국민 전체의 자존심을 해치는 행위”라며 “중국의 ‘전랑(戰狼·늑대 전사) 외교’는 자국에도 백해무익한 것으로 장기적으로는 세계 어떤 나라도 중국을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가에선 “전랑외교의 선봉장으로 꼽히는 친강(秦剛) 외교부장이 지난해 말 취임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공세적 메시지가 늘었다”는 관측도 있다.

여권은 이 대표와 싱 대사의 회동에 대해 사흘째 공격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1일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원내 제1당 대표가 중국대사의 집에 찾아가 모욕을 당하고서도 한마디 항의조차 하지 못했으면서 무슨 ‘국익 외교’를 했다는 거냐”고 비판했다. 군 장성 출신인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정부는 도발적 망발을 일삼는 싱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해 추방하라”고 주장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10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 후 기자들과 만나 “당연히 중국 정부의 그런 태도가 마땅치는 않다”며 한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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