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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아미와 개딸 사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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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남성 크로스오버 중창팀을 뽑는 JTBC 서바이벌 오디션 ‘팬텀싱어4’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투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절실한 마음을 잘 알기에 흔쾌히 약속했다. 가족을 동원해 매일 온라인 투표를 하고, 지난 2일 생방송 최종 경연 일에는 문자투표도 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결승에 오른 3팀 팬들이 여는 투표 인증 경품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경품 수준이 치킨, 문화상품권에서 골드바, 안마의자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팬들이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지난해 서올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 이재명 대표 열혈팬덤인 '개딸'들이 보낸 화환들이 놓여 있다. [사진 뉴스1]

지난해 서올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 이재명 대표 열혈팬덤인 '개딸'들이 보낸 화환들이 놓여 있다. [사진 뉴스1]

여느 아이돌 팬덤도 다르지 않다. K팝 팬덤이 약간의 자조를 섞어 스스로 ‘노동앰’(노동하는 애미)’이라 부르는 이유다. 상당수 아이돌이 시청자 문자투표로 결정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로 출발하기 때문에 연습생 신분일 때부터 ‘노동’이 시작된다. 내 손에 상대의 생사여탈권이 쥐어지니 ‘과몰입’도 시작된다. ‘애미’라는 표현은, 아이돌을 자기가 키우는 대상으로 보는 ‘양육팬덤’이어서다. 데뷔 후에는 음악방송 1위를 향해 ‘노동’한다. 음반을 사고, 스트리밍하고, 유튜브 뮤직비디오도 무한 재생하며 음방 1위에 필요한 점수를 채운다. 자발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요즘은 임영웅 등 트로트 스타들을 좋아하는 장노년 팬들도 ‘노동’한다. 투표가 중요한 각종 시상식에도 참전한다.

팬이 싫어서 아이돌이 싫어진다 # 아이돌 팬덤이 제일 경계하는 일 # 팬덤정치 끝은 고립 자초 게토화

 팬이 아닌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세계적 아이돌 BTS도 예외는 아니다. BTS 현상의 핵심은 BTS가 아니라 아미(팬클럽)란 말이 있을 정도다. 아미 팬덤은 K팝 팬덤 문화를 해외에 수출했고, 마침내 세계 대중문화의 지형도를 바꿨다. 보상은 별거 없다. 그저 아이돌이 좋아서, BTS가 좋아서, BTS를 함께 좋아하는 다른 팬들이 좋아서, 모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좋아서, BTS 성취가 내 성취 같아서다. 홀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이름(팬덤명)과 행동양식을 갖기에 소속감과 함께 스타에게 부끄럽지 않은 팬이 되겠다는 마음도 다진다. 팬과 스타의 동반성장이다.

그러나 열광이 있는 곳엔 늘 과열이 있다. 도를 넘는 극성팬들이 있고, 한때는 라이벌 팬덤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요즘은 소속사에 ‘헤메코(머리ㆍ화장ㆍ의상)가 별로다’ ‘안무를 바꿔라’ ‘특정 멤버의 분량을 늘려라’ 같은 ‘시어머니질’도 한다. 그러나 ‘팬은 스타의 얼굴’이라며 자정 작용이 일어난다. 사회적 평판을 의식하며 팬덤 이름으로 기부나 선행을 하고, 문제 있는 아이돌 멤버를 팬덤이 먼저 손절하기도 한다. 성숙한 팬덤과 악성 팬덤이 갈리는 지점이다. 팬덤이 성숙해야 아이돌이 오래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권에 느닷없이 아미가 호출됐다. 일체의 내부 비판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열혈팬덤 ‘개딸’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BTS보고 아미를 그만두라는 얘기가 가능하겠냐”(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는 말이 나왔다. 이 대표를 BTS에, 개딸을 아미에 빗대는 난센스야 그들의 자유라지만, ‘팬덤이 싫어서 그 아이돌이 싫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이돌 팬덤의 첫 번째 불문율이라는 걸 알고나 하는 얘기일까. 어차피 K팝은 열성팬덤만 잡으면 되는 팬덤 비즈니스지만, 정치란 팬덤을 넘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다. 하긴 민주당 친명 강경파 ‘처럼회’ 멤버인 이수진 의원이 진보 유튜브 채널에 나와 “윤석열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어요. 너무 싫어 죽겠어요. 지금도 윤석열하고 사진 찍고 싶다 그러고 잘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피가 끓죠”라고 말하며 박수받는 세상이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에게 증오를 퍼붓는 선출직 공직자의 믿기 힘든 망언이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해 개딸들에 대해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행태”라고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에 올려놓은 아미 얘기다. 팬덤정치의 끝은 고립을 자초하는 게토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