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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가장 시급한 민생 과제는 전세 안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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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송영훈 법무법인 시우 변호사

송영훈 법무법인 시우 변호사

‘전세’라는 임대차 관행은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에 특유한 현상이다. 집값의 절반, 혹은 대부분에 이르는 큰돈을 보증금으로 내건다. 한국에만 전세가 뿌리내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서민들의 은행 대출 문턱이 아주 높았던 고도 성장기에 전세는 유용했다. 임대인에게는 긴요한 사금융 역할을 해줬고 임차인에게는 낮은 주거 비용이라는 이점을 제공했다.

지난해 전세보증금만 1058조
집값 떨어지며 사기극도 속출
임차인 보호방안 더 신경 써야

물론 전세 계약은 임대차 기간이 끝났을 때 안전하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 이점이 된다. 사실 입법으로 상당 부분 물권화(物權化)되기 이전의 임대차는 본디 제삼자에게는 대항할 수 없는 채권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전세란 엄밀히 법적으로 말하면 그런 보장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전세가 보편적으로 활용된 이유는 집값의 장기적 우상향이 전제됐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법으로 임대차를 물권화해도 집값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면 ‘깡통 전세’ 위험이 쉽게 나타나 전세는 유지되기 어렵다. 지난 수십년간 크고 작은 전세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전세가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집값이 꾸준히 올라 보증금 반환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서 시작돼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 전세 사기 사태에서 보듯 상황이 급변했다. 자살자까지 잇따르면서 전세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집값이 급등하던 2020년 경제활동인구(15~64세)는 2513만 명이었지만 2030년이 되면 2388만 명으로 줄어들고 그 뒤로는 더 가파르게 감소한다니 집값의 장기 우상향에 대한 보장이 없다. 전세를 지탱해온 전제가 흔들리는 듯한 상황에서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전세는 보증금 미반환이라는 위험이 내재해 있지만 사회적 효용성이 여전히 크기 때문에 당장 사라져서는 곤란하다. 한국경제연구원의 지난 3월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 및 반전세의 전체 보증금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1058조원이나 됐다. 전세 보증금 반환에 대한 사회적 불안감이 증폭돼 월세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면 월세는 지금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불안해질 것이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급감하면서 발생할 경기 침체는 감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금융권의 전세대출 총액도 190조원이나 된다. 전세가 쉽사리 퇴조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씨줄과 날줄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정부는 첫째도 둘째도 전세의 연착륙을 도모해야 한다. 지난 25일 국회가 처리한 전세사기특별법에서 보듯 이미 전세 사기를 당한 임차인들에 대한 파격적 주거 지원과 금융 지원이 급선무다. 특히 공공주택특별법에 근거한 긴급 주거 지원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이런 일차적 대책들은 전세 사기를 당한 서민들을 위해서도 긴요하겠지만, 전세 연착륙을 위해서는 정교한 제도 보완을 위한 숙고가 필요하다.

전세 사기 범죄자에 대한 처벌 강화나 임대인과 임차인의 정보 비대칭 해소 방안은 상대적으로 간명하다. 하지만 많은 임대인이 다음 임차인으로부터 받는 보증금으로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을 내주는 현실을 고려하면, 최근 거론된 임대차보증금 의무 예치제도는 오히려 임차인 보호에 역행하고 전세 퇴조 현상을 심화할 우려가 있다. 2020년 당시 민주당이 거대 의석을 무기로 불과 일주일 만에 졸속 개정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전세 시장의 이중가격 등 시장 왜곡을 초래했다. 이런 난제를 정부가 제대로 연착륙시키려면 취약한 임차인들을 더 강력하게 지원하되 전세의 큰 틀이 무너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전세 제도는 여러 번 위기가 있었다. 1980년에는 서울지검에 접수된 민원 1만건 중 2000건이 주택임대차보증금을 못 받은 서민들의 민원이었고 이듬해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됐다. 전국적인 전세 폭등 현상이 있었던 1989년에는 법이 보장하는 임대차 기간을 2년으로 늘렸다. 이처럼 전세의 연착륙에 성공한 것이 모두 보수정부 때라는 점이 눈에 띈다. ‘전세의 가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전세가 존폐 갈림길에 선 지금 윤석열 정부는 반드시 전세를 연착륙시켜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민생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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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훈 법무법인 시우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