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홍성남의 속풀이처방

성인(聖人)이 필요한 시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요즘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나라의 민낯을 보면 마치 도떼기시장 같다. 좁은 땅덩어리에 붙어살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며 삿대질하고, 극단적인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반으로 나뉜 나라가 다시 반으로 동강 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든다.

고학력 해외유학파 경제 사기범들은 서민들의 피 같은 돈을 날로 먹고 튀질 않나, 남의 나라 이야기인 줄 알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마약에 우리 아이들이 손을 대질 않나. 도떼기시장도 이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정부는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큰소리치지만,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이다. 법으로 인성을 고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법집행자들의 윤리성을 신뢰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는 법치란 말이 비아냥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두 동강 날 것 같은 요즘
법치로만 사회 다스릴 수 없어
세상을 바꾸는 건 착한 사람들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 타계 직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 고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과 봉사, 희생과 사랑을 실천했다. [중앙포토]

1997년 9월 5일 마더 테레사 타계 직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미사. 고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과 봉사, 희생과 사랑을 실천했다. [중앙포토]

이런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다. 사회의 존경을 받는 대상이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가정에 어른이 없으면 콩가루 집안이 되듯이 나라에 어른이 없어도 같은 현상이 생긴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판을 치고 그 틈새에 사이비 종교들이 기세를 부린다. 그래서 법보다 존경받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존경의 대상을 성인(Saint)이라고 부른다. 성인은 사람에 대한 최대 존칭어이다. 성인들은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안에서도 아주 중요한 존재 의미를 갖는다.

성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성인들은 쓰러져가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등대 같은 존재들이었다. 중세 유럽의 많은 신자가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하여 교회에 등을 돌리려 하다가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수많은 선행과 기적을 일으킨 성인들 덕분이었다. 성인들은 대부분 수도자이었고, 이들은 신자들의 신앙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학자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를 교황들의 교회라 하지 않고 성인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성인들을 머리 뒤에 후광을 두른, 세상과는 별개로 격리되어 사는 별종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톨릭의 많은 성인은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성인을 소개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를 들 수 있다. 흙수저·금수저를 따지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산다는 천민 철학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사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 마더 테레사 수녀이다.

미국인 군종신부 에밀 카폰은 어린 동생 같은 미군들을 돌보려고 같이 포로로 잡히었고,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돌보다 병사한 신부이다. 그의 마음은 적군조차 감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의 신분으로 돈도 명예도 마다하고 내전 중인 남수단에서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인 나환자들과 함께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눈물을 모른다는 남수단 아이들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이다. 불자인 구수환 감독은 자신과 종교도 다른 가톨릭의 이태석 신부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오염된 한국사회의 치유를 위해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알리고자 오랫동안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에 많은 관객은 ‘울지 마 톤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성인은 종교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한 성인들은 세상의 희망이자 별이다. 이런 별들이 많을 때 암흑 속에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고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중세 유럽 가톨릭 국가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성인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성인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살레시오회에서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강의를 하던 중 당혹감을 느꼈다. 아이들 중 절반은 잘 웃고 감정 표현도 잘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수사들에게 물으니 무표정한 아이들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인데, 한 달 후면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법이 아니라 성인 같은 선한 사람들임을 그곳에서 보았다.

선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악한 자들이 발붙일 자리가 없는 세상이 진정한 민주사회이고,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불교·이슬람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에서 성인들이 많이 나와서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등대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