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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야, 나가 살까" 용기낸 성희씨…첫 탈시설 장애인의 결혼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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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야 사랑한다! 성희야 사랑한다! 성희야 사랑한다!”

19일 오후 대구 수성구의 한 결혼식장. 신부 김성희(54)씨를 향한 신랑 이경남(62)씨의 우렁찬 만세삼창이 식장 안을 울렸다. 새신부의 눈엔 금세 눈물방울이 맺혔다. 100여명이 앉은 하객석 곳곳에서도 눈물을 훔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하객들은 대부분 이들 부부와 함께 장애인시설에서 생활했던 동료나 사회복지사들이었다.

 19일 오후 4시 대구의 한 결혼식장 신부대기실에서 중증 정신장애인인 이경남씨(오른쪽)와 김성희씨가 웃고 있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19일 오후 4시 대구의 한 결혼식장 신부대기실에서 중증 정신장애인인 이경남씨(오른쪽)와 김성희씨가 웃고 있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정순천 대구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장은 축사에서 “신랑·신부는 지역 사회와 함께 당당한 홀로서기에 성공하신 분들”이라며 “최고로 행복할 자격이 있다.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봐 달라”라고 힘줘 말했다.

신랑·신부가 서로의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행진할 땐 환호와 힘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구 희망원서 만나 사랑 키워와 

신랑·신부 모두 중증 정신장애인이다. 정신장애는 인지능력이 떨어진 지적(발달)장애와 다르다. 신랑 이씨는 후천적 장애를 얻어 35세에, 신부 김씨는 선천적 장애로 25세에 각각 대구시립장애인시설인 희망원에 입소했다. 약물 복용을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하나 인생의 절반가량을 집단시설에서 지냈다.

이경남씨와 김성희씨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이경남씨와 김성희씨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대구행복진흥원에 따르면 이들은 대구희망원에서 만나 20년 이상 사랑을 키워왔다. 그러다 2021년 9월 평생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원에서 자립했다. 둘은 대구시에서 지원하는 남구장애인자립주택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첫 자립이었다.

혼인신고 소식에 결혼식 추진 

지난 2월 ‘혼인신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순천 행복진흥원장이 결혼식을 추진했다. 정 원장은 지역 미용실·결혼식장·한복집 등을 수소문했고, 다들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 지역 사회가 지원해 탈 시설한 장애인 커플이 정식 결혼식을 올린 건 전국에서 첫 사례라 한다.

김씨는 첫 만남에 대해 중앙일보 기자에게 “오빠야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희망원 매점에서 일하던 경남이 오빠는 잘생긴 데다 똑똑했다”며 “지금은 요리도 잘하고, 믿음직해서 좋다”고 말했다.

이씨는 “연애하니까 돈이 많이 들었다”며 웃었다. 당시 15만원을 벌면 10만원을 저축하고 5만원을 썼는데, 김씨를 만나다 보니 데이트 비용이 많이 들어 5만원밖에 저축할 수 없었다면서다. 이씨는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는 생각에 돈을 더 벌 수 있는 외부 공장에 일하러 나갔다”며 “큰맘 먹고 3만원짜리 목걸이를 샀는데 액세서리여서 그런지 금방 변질되더라. 돈 벌어서 금목걸이를 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씨의 말에 김씨는 결혼 예물로 맞춘 금목걸이를 꺼내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둘은 커플링도 맞췄다.

24년 연애 끝에 장애인시설에서 나와 자립해 결혼한 이경남, 김성희씨의 첫 커플링.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24년 연애 끝에 장애인시설에서 나와 자립해 결혼한 이경남, 김성희씨의 첫 커플링. [사진 대구행복진흥원]

처음엔 자립욕구 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원래 자립 욕구가 크지 않았다고 한다. 희망원 교사의 설득에 먼저 자립한 동료들의 장애인자립주택에 들렀다가 결심하게 됐다. 이씨는 “듣기만 했는데, 직접 보니 눈이 확 뜨였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내가 ‘오빠야, 밖에 함 (한번) 나가서 살아볼래’라고 했더니 바로 ‘그러자’더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희망원의 자립프로그램을 통해 음식 만들기부터 돈 계산, 전화 걸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등을 배웠다. 2021년 자립주택으로 입주한 후에는 정순덕 코디네이터가 약 복용 등을 체크하며 홀로서기를 도왔다.

평범하지만 소소한 일상서 행복 느껴 

이제 둘은 낮에는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안경 포장 등 소일거리를 하고 퇴근 후엔 함께 장을 본다.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씨는 “희망원에서 평생 살다가 죽는 동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탈 시설은 장애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다들 처음에는 두려워한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동료들에게 자립한 모습을 보여주며 독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다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몸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며 “집을 마련하기 위해 더 열심히 돈을 모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행복진흥원에서는 두 사람의 완전한 자립을 목표로 돌보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로 주거이전을 돕고, 복지관 등과 연계를 통해 단계적인 연착륙을 지원할 계획이다.

행복진흥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희망원에서는 54명이 자립했다. 정신장애, 지체장애 등이다. 희망원 자립지원팀은 자립 동기를 심어주고, 일자리 마련 등을 돕고 있다. 1~6개월간의 자립 체험도 제공한다.

정 원장은 “수십년간 시설에서 생활했던 장애인이 사회로 나와 보통의 가정을 꾸리며 지역 주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건 이상적인 탈 시설 모델”이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설 거주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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