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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핵보복’과 ‘핵공유’, 워싱턴 선언 복기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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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지난달 25일(현지시간). 기자들 사이에선 대통령실이 운을 띄운 ‘한국식 핵공유 방안’이 뭘지에 관심이 쏠렸다. “미국의 즉각적인 핵 보복”이 특별문서에 담길 거라고도 했는데, 거기 들어갈 최종 문구를 놓고 양측이 어려운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마지막까지 걸림돌이 됐던 것 중 하나가 ‘즉시(Immediate)’라는 단어였다. 한국이 핵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핵으로 ‘즉시’ 대응해 달라는 게 한국 측 요구였지만, 미국에선 난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오른쪽 두번째)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정상 회담 후 워싱턴 선언을 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오른쪽 두번째)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정상 회담 후 워싱턴 선언을 냈다. [뉴스1]

결국 다음날 발표된 워싱턴 선언에는 이 단어 대신 ‘Swift’가 들어갔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즉시’보다 ‘신속한’의 의미가 더 강하다. 당장 하기보다 내 차례가 됐을 때 빨리한다는 뉘앙스란 부연 설명도 있다. 하지만 워싱턴 선언 한글본에선 이를 ‘즉각적 대응’이라고 해석해 썼다.

일각에선 과연 이번에 ‘핵 보복’이 명시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워싱턴 선언에선 ‘핵을 포함한(including nuclear) 미국 역량을 총동원해 지원한다’고 적었다.

미 정부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미국인 입장에서 핵보다 다른 방안을 통한 해결이 먼저 떠오르는 문구라고 했다. 획기적인 확장억제 성과를 내세우고 싶은 한국과, 다른 동맹의 눈치를 봐 어떻게든 포장을 최소화하고 싶은 미국의 입장이 엇갈렸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정황은 정상회담 이튿날 에드 케이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국장의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드러났다. 회담 성과를 되돌아보는 가벼운 자리로 알고 참석했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워싱턴 선언은 사실상 핵공유”라는 한국 측 반응에 관해 묻자 케이건은 “직접적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이를 사실상 핵공유라고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작정한 듯 말했다. 다른 기자가 “내일 당장 미국이 한국 대통령실에 정면으로 반박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했지만, 케이건의 입장은 단호했다. “한국 대통령실이 핵공유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정의에 따르면 핵공유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결과적으로 방미 전부터 회자했던 ‘즉시 핵 보복’이나 ‘핵 공유’는 이번 회담 결과에 포함되지 않았다. 국빈방문의 흥분을 거둬내고 워싱턴 선언을 복기하면, 가속기를 누르는 한국과 브레이크를 밟는 미국이 곳곳에 보인다. 안심할만한 수준의 확장억제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