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경계와 한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어디까지가 경계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인지. 요사이 가장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강의실 풍경도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오래 전 첫 시간 강의를 하던 때였던가. 아직 축제 뒤풀이의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어제의 취기를 풍기면서 삼선 슬리퍼에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 복장으로 앉아있는 학생을 보았다. 이 학생에게는 출석보다 숙취를 해소할 잠과 해장이 필요한 것 같은데, 단 한마디도 못 하고 외면해버린다.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청춘들
장발·미니스커트 금했던 그때
‘안과 밖’의 경계 더 모호해져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요사이 종종 보게 되는 장면 중 하나는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본격적으로 화장하는 사람과, 앞머리에 커다란 롤을 만 채 태연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이다. 내게는 낯설고 불편한 모습이라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데,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괜히 꼰대 소리나 듣겠지.

수업시간에 MZ 세대라는 학생을 대상으로 이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학생들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우리 ‘꼰대’ 세대가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과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용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한 학생으로부터 흥미로운 답을 얻었다. 내 여자친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싫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뭐라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할 말을 잃는다.

우리 학창 시절을 잠시 되짚어 본다. 긴 머리 남학생은 장발족으로 불리며, 경찰에 쫓기는 신세로 골목을 돌아 달음질 쳐야 했고, 여자 치마 길이가 무릎 위에서 찰랑거리는 위험수위가 되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길거리에서의 애정표현은 풍기문란으로 보이는 사안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지만, 그 당시 남자의 장발과 여자의 미니스커트는 미풍양속의 한계를 넘는 일이었다.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자 했던 젊은이들은 경찰에 쫓기며 장발을 고수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하는 무용담을 훈장처럼 간직했다. 그 당시는 그랬다. 지금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런 일들이 무서운 공권력의 잣대로 마구 헤집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의 변화 속에 살고 있다. 예전에는 속옷 혹은 실내화나 실내복에 걸맞은 ‘안’이라는 개념과, 화장을 마치고, 머리를 다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밖’의 개념이 비교적 뚜렷했었다. 화장이나 헤어 롤은 실내에서 외출 전에 마쳐야 하는 의식이다. 화장실(化粧室)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제는 대중교통이라는 공공장소가 안방이나 화장실에서처럼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보이지 않게 했을 일을 버젓이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런 장면을 불편하게 느끼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것인지, 나의 이런 불편한 시선에 합리적 근거가 있는지 판단이 안 선다.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지나, 속옷인지 겉옷인지도 한눈에 가늠이 안 된다. 찢어진 옷은 가난의 상징이었는데, 새 청바지에 일부러 찢어 놓은 구멍이 한계를 넘는다. 유명 상표를 노출하려 솔깃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뒤집어 입은 것 같은 옷이 한순간 멋스러운 옷맵시로 유행이 된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 복장 규정 같은 것은 없다. 수업을 의식해서 정장을 차려입는 분도 계시지만, 자유롭고 편안한 차림새도 낯설지 않다. 젊은 신임교수는 언뜻 봐서는 누가 학생이고 누가 교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우리가 격식의 틀에서 벗어나게 된 하나의 계기는 아마도 스티브 잡스가 아닐까. 그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늘 검은 터틀넥 상의와 청바지, 같은 상표의 운동화로 무대에 섰다. 이후로 세계적 기업의 많은 CEO가 그를 따라 하고 있다.

정장에 어울리던 구두를 버리고, 편하게 이동하고 보다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컴포트화’나 ‘운동화’가 일상을 누빈다. 정장 차림에 생뚱맞은 운동화와 거북이 등짝처럼 둘러멘 백팩은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오는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요사이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낯익은 모습이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경계와 한계가 무색해진 지 오래다. 뒤샹의 ‘샘’이었던 ‘변기’부터, 팝아트를 넘어 이제는 AI가 만들어내는 작품을 두고 예술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좀처럼 곁을 내주려 하지 않던 클래식 예술의 정통성이라는 그 엄격한 잣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유행가를 성악가가 부르면 클래식이고 가곡을 가수가 부르면 대중가요인가. 팝페라처럼 크로스오버라는 말로 클래식과 팝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크로스오버에 열광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뭣이 중헌디’. 경계와 한계의 의미를 찾아 던지는 물음에 더해, 김민기의 노래 ‘친구’ 첫 소절을 흥얼거려본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최명원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