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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코인시장, 21세기 봉이 김선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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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기 위해선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평양 물장수들에게 엽전을 나눠주고 물을 퍼갈 때마다 한 푼씩 내도록 합의했다. 물론 공짜는 없다. 저녁에 거하게 한 잔씩 돌렸다. 또 한 가지 필수 작업은 이 소문이 한양 상인에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도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고 불티나게 팔린다는 스토리 라인을 갖춰서 말이다. 한양 상인은 소문만 듣고 덥석 4000냥에 인수 계약을 한다. 소유관계나 사업성을 확인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진 조선시대 버전. 어차피 설화니 조금 더 나가면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겠다. 물을 한 동이 길을 때마다 기록을 비밀장소에 남기면 토큰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나중에 토큰으로 쌀도 사고 술도 살 수 있다고 선전한다. 거래할 때마다 토큰을 새로 만들기 귀찮으니 미리 왕창 찍어두고 조금씩 지급한다. 아예 매장을 내서 그중 일부를 빼내 판다. 알바를 고용해 자기들끼리 사고팔아 가격을 올려놓는다. 더 오를 것이란 기대에 일반 백성까지 매장에 몰려든다.

정부, 코인 규제 의도적 방치 #사기 코인 범람, 피해 5조원대 #김남국 계기, 사각지대 없애야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빗썸고객센터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의 실시간 거래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빗썸고객센터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의 실시간 거래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뉴스1

 말도 안 되는 상상 같지만 지금도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예컨대 이런 경우도 있다.
 공기질 측정기를 판다. 산 사람이 측정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입력하면 토큰을 준다. 이 데이터를 공공기관·연구소에 팔아 수익을 올린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문서(백서)를 바탕으로 거래소에 상장한다. 꼼꼼히 심사한다면 거래소에서 받아줄 리 없는 문서다. 그 전에 사전판매(프라이빗 세일)로 목돈을 챙겨 놓는다. 상장되면 훨씬 가격이 오를 테고, 안 되면 접으면 그만이다. 물론 상장 후 사업성 없음이 증명되면 모두가 폭망이다. 미리 팔아 놓은 발행자와 초기 투자자를 빼고…. 실제 이 코인은 지난 5일 상장 폐지됐다. 얼마 전 강남 납치살인 사건의 배경이 된 퓨리에버 코인 얘기다.

'퓨리에버 코인' 백서에 실린 프로젝트 배경. 2016년 발생한 세계 전체 사망자의 7.6%가 대기오염 때문이라는 WHO 통계를 인용했다. 퓨리에버 코인은 공기질을 측정해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리면 보상으로 코인을 주는 구조로 코인을 발행, 국내 거래소인 코인원에 상장됐으나 최근 상장폐지 판정을 받았다. 백서 캡처

'퓨리에버 코인' 백서에 실린 프로젝트 배경. 2016년 발생한 세계 전체 사망자의 7.6%가 대기오염 때문이라는 WHO 통계를 인용했다. 퓨리에버 코인은 공기질을 측정해 데이터를 블록체인에 올리면 보상으로 코인을 주는 구조로 코인을 발행, 국내 거래소인 코인원에 상장됐으나 최근 상장폐지 판정을 받았다. 백서 캡처

 지난달 중앙일보가 보도한 ‘코인지옥’ 시리즈를 보면 이런 코인이 수두룩하다. 프로복싱 챔피언, BTS나 뽀로로 연예사업, 디즈니 세트장, 표적 항암세포 등 내세우는 사업모델도 다양하다. 아예 그런 것도 없이 “국내외 거래소에 상장하면 대박 나니 빨리 투자하라”고 꼬드기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초빙한 행사는 기본 코스. 코인이 다단계 업체 옥돌 매트 역할로 전락한 셈이다. 꼬임에 빠져 거액을 날리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21세기 김선달이 저지른 코인 관련 사기범죄 피해액은 지난 6년간 5조7615억원에 이른다.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지난 정부에선 가상화폐 거래 자체가 사기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급기야 2018년 1월 박상기 당시 법무장관은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입법안을 준비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나흘 만에 국무조정실이 나서 "그럴 일 없다"고 뒤집었다. 신산업 고사, 기존 투자자 피해라는 원성에 밀려 규제를 포기했다.
 이후 5년간 당국의 선택은 의도적 방치였다. 가상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인정해 투자자 보호 제도를 정비하자니 사기를 인정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무려 600만 명 가까이 거래에 참여한 코인 거래를 틀어막을 힘도 없었다. 2020년 거래소 신고제와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한 특정금융정보법을 도입한 게 규제의 전부다.
 2022년 이 법을 개정하면서 개인 거래도 실명만 허용했다. 하지만 거래 외양만 확인할 뿐, 내용물을 보는 것은 거래소에 미뤘다. 그나마 의무사항도 아니다. 물론 사업성과 구조가 분명하고 발행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코인도 많다. 하지만 그게 사기성 코인과 뒤범벅돼 있다. 언제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9일 의원회관 의원실로 향하고 있다. 김 의원은 최대 60억원 대의 가상화폐를 보유한 상황에서 가상화퍠 차익에 대한 과세를 유예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8일 주식을 매도한 돈으로 가상화폐에 투자했으며 모두 실명으로 거래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 이후에도 의혹이 가라앉지 않자 9일 결국 사과문을 했다. 사진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9일 의원회관 의원실로 향하고 있다. 김 의원은 최대 60억원 대의 가상화폐를 보유한 상황에서 가상화퍠 차익에 대한 과세를 유예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8일 주식을 매도한 돈으로 가상화폐에 투자했으며 모두 실명으로 거래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 이후에도 의혹이 가라앉지 않자 9일 결국 사과문을 했다. 사진 연합뉴스

 제도가 부재한 탓에 일탈에 대한 처벌도 쉽지 않다. 그러니 50조원 규모의 피해를 냈다는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가 몬테네그로에서 잡히자 차라리 미국으로 송환하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최근 불거진 김남국 의원(더불어민주당)의 거액 코인 보유 의혹에도 이런 문제점이 깔렸다. 분명히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지만 투자자산이 아니어서 재산신고 대상에서 빠져있다. 그런 상태로 투자 차익에 과세하는 법률안을 제안했으니 이해충돌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
 김 의원이 어떤 가상화폐를 사고팔아 얼마나 이득을 남겼는지 규명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가상화폐 자체를 인정하고 건전한 거래를 하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재산등록 대상에 올리고 거래 내역도 공개하는 것도 필수다. 지금은 김 의원 개인의 문제 같지만, 막상 이런 규제가 시행되고 나면 국민의 뒷목을 잡게 할 공직자가 숱하게 나올 수 있다.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위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