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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참모에 "내게 맡겨달라"…기시다 '슬픈 경험' 발언 전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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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이 끝난 뒤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이 끝난 뒤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실 참모들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 툭 나왔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의 과거사 관련 발언이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나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수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수많은 분들”이란 부분이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일본 정부는 최근 수년간 강제징용 피해자를 ‘구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 규정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해왔다. 그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먼저 유감을 표명한 셈이다. 기시다 총리는 이후 질의응답에서도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하신 말씀이냐”는 한국 측 기자의 질문에 “당시 힘든 경험을 하신 분들에 대해서 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개인적 발언이라 선을 그었지만, 과거보다 진전된 입장이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8일 “사전에 우리에게 전달한 내용이 아니었다”며 “현장에 있던 일본 관료도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후 나란히 이동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후 나란히 이동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기시다 총리는 방한에 앞서 과거사와 관련한 실무진의 기술적 보고를 수차례 받은 뒤, 참모들에게 “과거사는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정상회담 전 양국 협의 과정에서 한국 측은 일본에 과거사에 대한 입장을 요구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본 언론에서도 “반성이나 사죄는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는데,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그 예상을 깬 것이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기시다 총리가 한국 국민에게 진심을 전할 방법을 홀로 고민하고 결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기시다 총리에게 “한국이 먼저 여기에 대해 꺼내거나 요구한 바가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서 감사하다. 한·일 미래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는 고마움을 표했다.

대통령실은 기시다 총리의 발언이 한·일 두 정상 간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아키바 다케오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미래를 보고 갔으면 한다. 기시다 총리가 한국에 마음 편히 오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이제 막 셔틀외교가 복원된 상황에서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자는 취지였다.

기시다 총리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께서 나타내신 결단력과 행동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며 “일·한 관계의 강화를 원하는 강한 마음을 저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9월 뉴욕에서 어렵게 만났던 기시다와, 3월 일본에서 만난 기시다, 그리고 5월 한국에서 만난 기시다는 만날 때마다 전혀 다른 사람이란 생각이 들 정도”라며 “윤 대통령이 보낸 신뢰에 기시다 총리도 점차 마음을 열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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