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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병주의 시선

송영길의 검찰 무단 출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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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을 받는 송영길 전 대표가 지난 2일 갈 곳은 서울중앙지검이 아니었다. 정치 9단이라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말을 빌리면 ‘적당한 장소’(국회방송 국회라이브1 인터뷰)가 따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갖은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이중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 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같은 효과를 누리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곱씹어 본다. 몸담았던 민주당과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제스처로, 검찰을 향해서는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 표시로 보였다. 나아가 수사받는 대상으로서, 불기소 혹은 최소 불구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 전 총재는 2003년 야당 총재로서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불법 대선자금 모금은 전적으로 내 책임으로, 내가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이 모든 짐을 짊어지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며 소환통보도 없었는데 자진 출석했다. 결론적으로 검찰은 이 전 총재를 참고인으로 조사했을 뿐 피의자 입건 조치도 하지 않고 수사를 끝냈다.

대선자금 수사 이회창 떠올라
증거·주변인 진술에선 큰 차이
검찰 정치적 고려 여지도 없어

형사소송법은 ‘수사에 필요한 때에는 피의자의 출석을 요구해 진술을 들을 수 있다’(제200조)고 규정한다. 이 법대로라면 송 대표는 물론 이 전 총재도 검찰도 반칙한 셈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전 총재가 출석한 2003년 12월 15일은 이미 큰 줄기의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이었다. 유수의 대기업들이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시인했고, 증거가 나왔으며, 개입한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었다.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에 대한 조사는 충분히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송 전 대표는 압수수색까지 당한 피의자 신분이고, 이 전 총재의 경우 자신의 말과 달리 불법자금 모금을 지시했다는 주변인의 진술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떤 범죄 피의자도 자기 마음대로 수사 일정을 못 정하는데 이는 특권 의식의 발로”(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라는 지적이 과하지 않다. 출입증도 받지 못하고 ‘입구컷’ 당한 송 전 대표의 “주위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저 송영길을 구속시켜주기 바란다”는 바람은 개그 프로그램의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송 전 대표의 행위가 2003년 이 전 총재의 자진 출석을 상기시키며 묵혀있던 질문 하나를 던져줬다. 이 전 총재에 대한 참고인 조사 후 검찰이 선택한 길이 타당했느냐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내가 모금에 관한 지시를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지만 자신의 주장일 뿐이었다. 대선 후 남은 채권 150억원어치를 전 사무총장에게 보관하라고 지시한 사실을 밝혀냈으나 처벌 범위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때도 궁금했는데 송 전 대표가 그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 줬다. 답을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의 브리핑에서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 문제는 어떻게 결론 내렸냐”는 질문에 그는 “기본적으로 불법 대선자금 모금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 전 총재 역시 불법 정치자금 모금을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게 추가 조사를 하지 않고 참고인 조사로 마무리한 이유였다. 이 문제를 놓고 중수부는 수사팀 전체 회의까지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직접적이지 않지만 측근이 돈을 받는 지근에 있었고, 자신이 보유했던 샘물회사 장수천 관련 측근들 비리도 드러난 상황에서 아예 조사조차 안 받았다. 현직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짓지 않는 한 재직 중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헌법(제84조)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수사팀 내부에서도 진실 규명을 위해서 최소한 서면이나 방문 조사라도 해 놔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수사 결과를 두고 오히려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과 안 중수부장은 ‘송짱’ ‘안짱’으로 불리며 국민검사로 각인됐다. 정치권은 물론 국민도 대부분 수긍했다. 기업들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불법자금을 끌어다 쓰던 정치권 관행을 끊어내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컸고,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상당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검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조사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제1야당 총재를 본격 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요즘 자주 듣는 법무부ㆍ검찰 인사들의 말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한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당장은 이런 ‘정치적 균형’이 고려될 것 같지 않은 송 전 대표에 대한 수사 진행과 결과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