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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대중시인 김지하, 대중가수 조용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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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2014년 10월 수묵산수화 전시를 앞두고 중앙일보와 만난 김지하 시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4년 10월 수묵산수화 전시를 앞두고 중앙일보와 만난 김지하 시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김지하(金芝河)가 영욕의 몸을 벗고 지하(地下)로 돌아간 지 1년이 된다. 오는 8일 그의 1주기를 추모하는 공연·전시 등이 4일부터 열린다. 안치환이 부른 김지하의 ‘새’를 읊조려 본다. ‘저 청청한 하늘/ 저 흰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감옥 너머의 새를 부러워했던 시인은 지금쯤 ‘저 청청한 하늘’을 날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묶인 가슴’으로 울고 있을까.

70~80년대 ‘저항의 아이콘’ 1주기
가왕과 교류하며 ‘대중’의 뜻 기려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생명 모심’

 김지하는 어린 시절 글보다 그림을 더 좋아했다. 9년 전 수묵산수 전시를 앞둔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면 배고프다’며 제 두 손을 묶어 놓았어요. 발가락에 숯을 끼고 꽃도, 새도 그리며 반항했죠”라던 그가 생각난다. 자신을 달마 대사처럼 우락부락하게 그린 ‘자화상’도 기억난다.
 김지하는 노래에도 일가견 있었다. 1980년 오랜 영어(囹圄)에서 풀려난 그는 술자리에서 가요 몇 자락을 질펀하게 뽑아내곤 했다. 회고록에서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던 나의 노래! 마치 내게 섹스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다. 나중에 건강이 나빠지고, 주변과 멀어지면서 술과 노래 다 끊었지만 말이다.

김지하 자화상

김지하 자화상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김지하와 조용필은 한때 ‘형님’ ‘아우’로 지냈다. 시인이 1941년생, 가객이 1950년생이니 아홉 살 차이다. 1970년대 시인은 교도소 철창 사이로 들려온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흥얼거렸고, 출소 이후 지인의 소개로 가왕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인사말이 절창이다. 조용필이 “저는 대중가수예요”라고 소개하니 김지하가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응수했다.
 ‘오적’의 김지하가 대중시인? 김지하는 진심이었다. 회고록을 마치며 이렇게 적었다. “대중가요는 시보다 더 값진 시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보석일 수 있다. 그가 ‘저는 대중가수예요’라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다.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대꾸한 것은 대중을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감옥 안에서 숱한 도둑님들이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중들에게 큰 빚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이후에도 종종 만났다. 조용필이 원주의 김지하를 찾아가 밤새 노래시합을 벌이고, ‘촛불’을 코맹맹이 소리로 부른 시인에게 가왕이 두 손을 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담은 조용필의 ‘생명’이 탄생한 데도 김 시인의 역할이 컸다. ‘애기가 달님 안고 파도를 타네/ 애기가 별님 안고 물결을 타네/ 대지여 춤춰라 바다여 웃어라.’ 배반·변절이란 비난까지 들으면서 자유·민주에서 생명·모심으로 대전환한 시인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가.
 조용필은 그의 창법을 만든 건 “40년 전 들은 민요 ‘한오백년’”이라고 했다. 김 시인의 가슴에 줄곧 흐른 것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가 아닐까 싶다. 일흔셋의 가왕은 오늘도 무대에 오른다. 20집 앨범에 수록될 신곡 ‘필링 오브 유’ ‘라’를 최근 발표했다. 나이를 잊은, 더 젊어졌다는 평가다.
 김지하는 조용필 노래 중 ‘촛불’을 가장 좋아했다. “‘촛불’을 모시러 가야 한다. 모심이라는 한마디에 나의 삶과 세계에 대한 앎을 집약할 수 있게 된 오늘까지의 삶이 꼭 실패만은 아닐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지하도 잊힐 것이다. 반면에 ‘모심의 정신’은 오래오래 남을 터다. 문학도, 정치도 함께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여기저기 흩어진 김지하의 글을 모을 때다. 추모문화제 측도 전집 간행, 아카이브 구축을 중·장기 과제로 꼽았다. 시인과 친밀했던 소리꾼 임진택의 한마디가 아리다. “먼저 유족(아들 둘)과 협의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회에서, 시대에서 받은 상처가 아직도 너무나 큽니다.” 지금도 끝나지 않는 고통의 노래, 시인의 업보였던 5·16과 5·18의 5월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