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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동흠이 소리내다

일본은 17%, 한국은 1%…밀 자급률 높인다는 공허한 메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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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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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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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유례없는 쌀값 폭락의 여파로 발의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거부권 행사와 국회 재투표 결과 최종 부결됐다. 다만 이 법안을 밀어붙인 야당이나 이에 반대한 정부·여당 모두 쌀 대신 밀이나 콩 등 다른 작물로 전환해 수요∙공급을 맞춰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4월 6일 ‘농업의 미래산업화를 위한 발전계획’ 등에서 밀 자급률을 오는 2027년 8%, 2030년까지 10%로 올리겠다는 농정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과연 실현 가능한 목표일까. 정부는 2008년부터 밀 자급률을 획기적으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2018년 12월 밀 산업 중장기 발전대책을 발표하고 2017년 1.7%인 밀 자급률을 2022년 9.9%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밀 자급률은 2021년 1.1%에 그쳤다. 15년 동안 계속된 약속에도 여전히 1%에 머물면서, 밀 자급률 이야기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와 같은 소리가 되고 말았다. 농촌현장, 산업현장 어느 곳에서도 이 목표에 대한 신뢰가 없다.

밀 자급률 제고는 블루오션이 아니다

1%라는 낮은 밀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블루오션이 아니다. 국산 밀이 기존 수입밀의 자리를 차지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2022년을 제외하고, 수입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 온 게 미국 밀이다. 연간 5000만t 생산 중 그 절반을 수출한다. 여러 차례 정선을 하고, 마지막 단계에 수입국 요구에 맞게 엄선한 밀을 실어 보낸다. 1회 운송 규모가 5만t 전후에 이른다. 호주∙캐나다∙프랑스 연간 생산량도 3000만t 전후로 미국산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한국 시장에 닿는다. 여기에다 국내 농가보다 최고 1000배 이상에 이르는 경작 규모에서 생산된 밀이 자유무역협정(FTA)에 힘입어 모두 무관세로 들어온다. 수입밀은 품질∙가격 모두에서 ‘차이’라는 말을 넘어 국산 밀이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시장을 외면한 공허한 메아리

2021년 한국의 밀 자급률은 1.1%이다. 생활협동조합 등이 중심이 된 안전한 먹을거리를 선호하는 소비자층이 뒷받침한 수치이다. 이들의 2021년 연간 밀 소비량도 국가 통계가 제시하는 36.9kg에 준할 것이며 밀 자급률 올리자는 국민∙국가적 과제에 부응해 갑작스레 소비량을 대폭 늘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새 소비층이 형성되지 않으면 밀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형마트에서 제품을 고르며, 연간 250만t의 밀을 소비하는 국민들의 손이 국산 밀에 닿게 만들어야 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농가에서 재배한 밀을 수확하고 있다. [사진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농가에서 재배한 밀을 수확하고 있다. [사진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

이를 위한 기본 전제는 시장 조사이다. 시장에 왜 국산 밀 제품이 자리하지 못하는지, 같이 자리해도 왜 선택을 못 받는지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 2008년 이후 국산 밀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부르짖었지만, 이것이 자급률 제고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밀 소비 결정권은 개인보다 제조사∙업소

오늘의 밀 소비는 반죽한 밀을 홍두깨로 밀어 국수를 끓이던 시대와 다르다. 국수∙라면∙빵∙과자 등 완제품을 통한 소비가 대부분이다. aT농수산물유통공사 발간의 『라면 2022년 가공식품 세부시장현황』 자료는 국내 밀가루 소비에서 식품제조사와 업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95%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조사와 업소가 밀 소비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품질∙가격 부분이 더욱 엄중하게 준비되어야 함을 뜻한다.

‘우리밀세상을여는사람들’에서 국내 라면 시장 소요량을 자체 추정한 결과를 보면 상위 12위까지 제품의 연간 수요량이 1만t을 넘는다. 국내 연간 밀 생산량 2만~3만t(2023년 6만t 이상 추정)의 거의 절반을 필요로 하는 양이다. 그렇지만 그 절반을 모두 라면 생산에 쓸 수도 없다. 1만t은 양을 넘어서 특정 사양에 맞는 균일 품질로 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5개 이상의 품종을 5000명 이상의 농민이 서로 다른 재배 환경에서 생산하고 있는 우리 여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장 국수 거리에서 부담 없이 국산 밀을 선택해야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2027년 8%, 2030년 10% 이런 선언 말고, 분명한 정책 의지 속에 장기적 접근을 해야 한다. 가장 긴급한 과제는 가격경쟁력 확보이다. 대형마트나 대구 서문시장 국수 거리를 찾는 소비자가 국산 밀을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도록 가격을 내려야 한다. 제품 가격 인하는 원료 농산물 가격 인하에서 비롯된다. 바로 제조 기업이나 업소가 농가로부터 낮은 가격에 원료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밀 수매가를 낮춰야 한다. 아니면 정부가 고가에 구입한 것을 사업자에겐 싼값에 제공해야 한다.

양곡관리법 논란 과정에서 밀 생산을 위한 정책적 보완 과제도 제시됐다. 공익형 직불금을 2027년까지 5조원으로 확대한다는 계획도 발표됐다. 핵심은 국산 밀 가격을 어떻게 수입 밀과 경쟁 가능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느냐다.

2008년 중장기 밀 자급률 목표로 10%가 나왔을 때, 일본 밀 자급률은 12% 전후였다. 당시 목표를 세울 때 일본의 사례를 참조했을 것인데, 일본의 경우 밀 농가의 소득 중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이 84%에 이른다는 것은 도외시했다. 일본은 이런 꾸준한 투자 결과 밀 자급률이 2021년 17%까지 올랐다.

일본 농가소득은 지방자치단체별 수요자 대상 입찰을 통한 알곡 판매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주어지는 논활용직접지불금과 밭작물직접지불금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주목할 점은 입찰을 통한 알곡 판매는 제분업자 등 입찰 참여자들이 수입산에 비해 결코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된 알곡 가격이 농가 생산비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국가∙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보조금으로 메우는 것이다. 농식품부가 말한 전략작물직불금은 일본의 논활용직불금에 그치기 때문에 가격∙품질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밭작물직접지불금 같은 별도 대책을 추가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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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같아진다고, 설사 수입밀보다 싸진다고 밀 자급률이 금방 오르지 않는다. 품질도 함께 개선돼야 한다. 국내 밀가루 시장에서 수입밀 제품이 100여 가지 이상 생산되어 소비자에 이르는데, 국산 밀은 강력∙중력∙박력이라는 밀가루 품질의 가장 기본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가격 경쟁력이 갖춰진다면, 일정 부분 소비 신장은 필연적이다. 그 과정의 반복에서 국산 밀의 품질 안정성도 크게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강력∙중력∙박력 정도라도 품질 안정화를 기하려면 얼마의 밀이 필요할까. 필자는 최소 20만~30만t은 있어야 하리라 본다. 2023년 6만t 생산 목표조차 벅차하는 국내 현실에 이 규모는 언감생심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과감한 조처가 있어야 작은 틈이라도 낼 수 있는 것이 국내 밀 시장이다. 이러한 고심을 반영한 정책이 나오고 제대로 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2100년에 이르러도 밀 자급률은 1%에 그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