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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블레임 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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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위문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위문희 정치부 기자

위문희 정치부 기자

“블레임 룩이 뭔지 몰라? 사람들 눈을 가리는 거야. 우리가 모시는 오너 일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가 아니라. 뭘 입고, 뭘 신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에서 배우 김희애가 재벌가 자제의 검찰 출두를 앞두고 블레임 룩의 활용법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블레임 룩은 ‘비난하다’라는 뜻의  블레임(blame)과 ‘스타일’을 의미하는 룩(look)의 합성어다. 사회적 논란이 된 인물의 패션이 주목받는 현상을 일컫는다.

국내에 블레임 룩 현상을 일으킨 첫 사례는 1999년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티셔츠다. 907일간의 도주 행각보다 그가 입은 ‘미소니’ 모조품 티셔츠가 더 눈길을 끌었다. 2000년엔 로비스트 린다 김이 검찰 출두 때 쓴 ‘에스까다’ 선글라스가 불티나게 팔렸다. 블레임 룩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재벌가라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유명 인사가 주인공이라면 대중의 눈과 귀는 더욱 쏠리게 된다. 2016년 국정농단 관련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사용한 ‘소프트립스’ 립밤이 1.99달러라는 가격과 함께 화제가 됐다. 당시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이 립밤의 해외 직구 방법을 묻는 글이 잇따랐다.

정치인이 블레임 룩으로 논란을 피해 가려면 어떤 수단이 효과적일까.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4일 파리에서 조기 귀국할 때 왼손에 들고 있던 빨간색 표지의 책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 영어 원서였다. 송 전 대표는 그 책을 들고 온 이유에 대해 “북한의 추가 핵실험이 예상돼 핵 문제를 공부했다”고 대답했다.

2021년 전당대회 당시 돈 봉투 의혹에 책임을 지겠다며 예정보다 두 달 빨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그였다.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듯한 면모를 보여준 그의 모습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따라 한 것 아니냐는 비판마저 일었다. 교보문고에서도 한국어 번역본은 과학 분야 100위에 머물러 있다. 화제성·흥행성 모두 실패한 블레임 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