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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4월 수상작] 홍도, 병풍을 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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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홍도, 병풍을 펴다
권규미

소슬한 바람무늬
쪽마다 초서체다
천년 벼린 물빛의 심지 같은 절리들이
해무의 끓는 핏속에 뼈를 묻는 으스름

물결들 왁자하니 빠져나간 기슭에
마고의 긴 손톱자국, 이끼로 돋아나면
묵묵히 찬 어구를 놓고
무릎 꿇는 바닷새들

하루치 적막들이 으스름을 굴려가며
뻘밭에 발을 묻은 층층 붉은 돌을 괴어
밤마다 흰 척추를 펴고
별을 문 채 잠드는 섬

◆권규미

권규미

권규미

2013년 월간 유심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경주문인협회 회원. 2022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그늘의 생존
배순금

잎새들이 꼬리 물고 그늘을 줄 세워요
날아드는 새들에 안부를 주고받고
때로는 파고드는 바람과 골짜기에 들어요

하지 무렵 논밭에 늦보리 출렁이면
다랑이 둔덕으로 스며드는 명지바람
유년의 누런 파도는 가난을 기억해요

마지막 철거를 코앞에 둔 슬레이트집
숨어든 그늘 곁엔 왼 종일 거둔 폐지
왜바람 허공을 들락날락 야윈 하루
저물어요

차하

바둑
이기동

기초를 다진 곳에 검은 돌 먼저 놓고
생각이 멈춘 곳에 하얀 돌 나중 놓고
머리 속 도면을 보며 놓아가는 돌 돌 돌

기둥을 세워놓고 돌담을 연결하면
부딪친 감성들이 하나 둘 깨어나고
돌과 돌 만난 곳마다 불꽃튀는 점 점 점

돌과 점 하나된 곳 무한한 묘수의 터
한울에 단 한자리 깊고도 오묘한 곳
그 한 곳 내 꿈이 될 때 무릎치는 집 집 집
※한울: ‘우주’의 순 우리말

이달의 심사평

장원으로 권규미의 ‘홍도, 병풍을 펴다’를 선한다. 보내온 세 편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 주고 있어 믿음이 갔다. 활달한 상상력과 탁월한 묘사로 홍도라는 붉은 섬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내면화한 뛰어난 작품이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홍도를 새롭게 해석하여 “심지 같은 절리” “마고의 긴 손톱자국” “층층 붉은 돌”로 형상화하였고 종장의 “해무의 끓는 핏속” “별을 문 채 잠드는 섬” 같은 신선한 표현은 이 작품을 한 층 돋보이게 하여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감을 갖게 했다.

차상으로는 배순금의 ‘그늘의 생존’을 선한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음지의 현장을 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늘”과 “생존”의 무게를 잘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종장의 “왜바람”이라는 시어의 어감이 묘하게 걸린다. 다른 작품에서 보여 준 “숙명”이나 “단말마” 같은 시어도 마찬가지로 시어 선택이 작품의 완성도를 가르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차하는 이기동의 ‘바둑’이다. 바둑을 두는 과정을 장과 장, 연과 연을 잘 연결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검은 돌과 하얀 돌이 만나 기초를 다지고, 도면을 보며 하나 둘 기둥을 세워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바둑의 오묘한 묘수로 이끌어 낸 점이 돋보였다. 우주에 오직 집 한 채 갖기를 소망하는 청춘들의 꿈이 잘 드러나 있다.

심사위원 정혜숙, 손영희(대표집필)

초대시조

버릴까
홍성운

“이제 그만 버리세요” 오래전 아내의 말
수십 년 내 품에서 심박동에 공명했던
버팔로 가죽지갑을 오늘은 버릴까 봐

몇 번의 손질에도 보푸라기 실밥들
각지던 모퉁이는 이제 모두 둥글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많이 닮았다

그냥저냥 넣어뒀던 오래된 명함들과
아직까진 괜찮은 신용카드 내려놓으면
어쩌나, 깊숙이 앉은 울 엄니 부적 한 점

◆홍성운

홍성운

홍성운

1959년 제주 출생. 199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조집 『숨은 꽃을 찾아서』 『오래된 숯가마』 『버릴까』 등.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역류동인 등으로 활동.

프랜시스 베이컨은 오래될수록 좋은 것으로 네 가지를 꼽았는데 장작으로 태우기 좋은 나무, 마시기 좋은 와인, 신뢰하기 좋은 친구, 읽기에 좋은 작품이 그것이다.

적당히 오래돼야 좋은 것도 있는데 가죽 제품이다. 구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갑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지갑을 장만해 소중하게 품고 다닌다. 신분증, 신용카드, 명함, 돈,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까지, 지갑은 가장 곱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한다.

화자는 오래돼서 너무나 편안해진 이런 가죽 지갑 하나를 수십 년 쓴 모양이다. 그러니 “몇 번의 손질에도 보푸라기 실밥들”이 풀려나오고 “각지던 모퉁이는 이제 모두 둥글어”졌다. 어느 날에는 보다 못한 아내에게 그만 버리라는 지청구를 듣는다. 화자는 드디어 “버릴까” 어쩔까를 고민한다. 오랫동안 자신의 “심박동에 공명”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많이 닮았다”하니 그 갈등은 오래 지속된다. 그러다 독자들에게 묻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째 버리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 것 같다. 여태껏 자신을 지켜준 “울 엄니 부적 한 점”이 여기 있다고 말하면서.

강현덕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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