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조 백일장-3월 수상작] 빼어난 말부림, 읽는 즐거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성산포

성산포

성산포에서
박숙경

간밤에 몰래 와서 수면 위 잠이 든 별
파도가 흔들기 전 나 먼저 깨워 볼까

간신히 귓불에 닿은 이명처럼 숨비 소리

막 썰어낸 뿔소라를 한 접시 당겨놓고
소주 생각 없다는 말 이곳에선 금기어

바람은 억센 손아귀로 머리채를 흔들고

저 멀리 먹구름에 휘감긴 두모악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저 혼자 숨바꼭질

물결이 물결을 잡고 바람을 표절하는

◆박숙경

박숙경

박숙경

경북 군위 출생. 2015년 동리목월 신인상. 2021년 7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시집 『날아라 캥거루』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대구시인협회·시하늘문학회·은시문학회 회원.

차상

로봇청소기
한명희

흘러내린 소리를 순식간에 닦았어요
틈 사이에 끼어 있는 어제 흘린 말까지
이제 막 퇴근한 그는 알아채지 못했어요

모서리에 부딪혀 터져 나온 비명이
바깥으로 샐까 봐 꼭꼭 눌러 삼켰어요
나를 다 안다는 듯이 그는 환하게 웃었죠

속속들이 당신은 옳아 나의 말을 잘랐어요
바닥에 나뒹구는 부서진 모음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지워지는 그림자

차하

라켓 줄 매는 여자
김정애

땀과 눈물이 베인 스물두 코 줄을 끊고
겹겹 주름에 숨은 행간을 고쳐맨다
반 코씩 엇갈리며 꿴 이 저편의 균형을
줄 하나 사이에 둔 너와 나 만남 또한
드라이브 하이클리어 밀고 당긴 한판이지
역전과 반전의 미학 칼로 베는 물처럼
땀으로 덮어쓰는 눈물의 보법 같은
저 환한 어둠이 짠 씨 날줄 무늬 하나
또 하루 밑줄을 긋듯 맞물린 올 당긴다

이달의 심사평

새 학기가 시작되는 바야흐로 삼월, 봄꽃들이 화사하다. 일찍 핀 목련은 지고 뒤이어 수선화며 앵두꽃이 질서정연하게 피어난다. 이달에도 시조를 향한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여전히 음보가 어긋난 작품들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공들여 쓴 작품도 시조의 기본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옥에 티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난다.

3월의 장원으로는 시조의 정형 미학에 충실하면서 말부림이 뛰어난 박숙경의 ‘성산포에서’를 올린다. 각 장의 연결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시조에서 꽃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가 빼어났다. 다만 제목을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보내온 세 편이 한결같이 일정 수준에 닿아 있어서 읽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차상은 한명희의 ‘로봇청소기’를 앉힌다. 청소기를 의인화해서 새롭게 접근했다. 발상이 좋았으며 전달력이 뛰어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같이 보내온 ‘세탁소의 하루’ 역시 세탁소의 일상을 나직한 목소리로 일기처럼 읊었다. 생활에서 시를 빚어내는 감성이 범상치 않았다.

차하는 김정애의 ‘라켓 줄 매는 여자’를 앉혔다. 라켓의 씨줄 날줄을 인간관계에 빗대어 쓴 작품이다. “줄 하나 사이에 둔 너와 나의 만남”이며 “역전과 반전의 미학 칼로 베는 물처럼”에서 읽을 수 있듯이 “눈물의 보법” 같은 우리네 삶을 라켓에 비유해 잔잔하게 써 내려 갔다.

주은의 ‘블랙커튼’, 한승남의 ‘15분의 의미’, 김준혁의 ‘항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서숙희·정혜숙(대표 집필)

초대시조 

안국사
황영숙

상처도 곱게 아문 툇마루 골을 따라
다 닳은 승복 한 벌 허물처럼 벗어놓고
스님은 어디로 가셨나
반쯤 열린 적막 한 채
“기다림이 발효지요 발효가 곧 성불이지요”
그 말씀 그 뜻대로 익어가는 골짜기
해종일 장독만 닦는
불두화가 사는 집

◆황영숙

황영숙

황영숙

경남 고성출생. ‘유심’ 등단. 시집 『크리넥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오늘의 시조시인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 수상.

우리는 마음속에 절 한 채씩 품고 산다. “상처도 곱게 아문 툇마루”가 있고 “반쯤 열린 적막”이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바라는, 마음의 변방이 되어 주는 절이 한 채씩 있다. 그 배경에 있는 ‘안국사’는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있을 법한, 스님 혼자 주지도 되고 보살도 되는 숨은 보석 같은 곳이다. 간혹 시인들이 모여 음악회도 열고 소박한 절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는 그런 곳.

“해종일 장독만 닦는” 불두화가 주인인 절 마당에 들어서면 “다 닳은 승복 한 벌 허물처럼 벗어 놓은” 스님은 간데없고 평소 스님이 하시던 말씀이 죽비가 되어 달려든다. “기다림이 발효지요, 발효가 곧 성불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적막한 절 마당에 홀로 앉아 사색에 잠기는 것이다.

단아한 호흡으로 써 내려 간 이 한 편의 시조는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이끌고 간다. 사변을 늘어놓지 않고도 절묘한 묘사를 통해 행간과 행간 사이의 폭을 크게 넓혀 놓고 있는 것이다. 절과 스님과 시가 함께 익어가고 있는 마음속 절 한 채를 지어서 시인은 우리 앞에 헌납한다. 발효의 시간이다.

손영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중앙 시조의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 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