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조 백일장-5월 수상작] 바닷길 재단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장원

바닷길 재단사
한승남

바닷길과 맞대어져 항구의 사연 깁는다
양복점 라사 거리 바다 향기 품을 때
옷감에 파도 떠다니듯 스쳐 가는 가윗날

조각난 해풍은 수습 시절 한숨일까
외항선원 주문 양복 리듬 맞춰 꿰매갈 때
물무늬 둥글게 말려 품 안에 밀물진다

수평선을 한 땀 떠서 깃 위에 앉혀놓고
내 안의 매듭 춤 물살에 풀어 짓는다
저녁놀 긴 솔기 따라 저물어간 광복동

◆한승남

한승남

한승남

서울 출생. 고려대 정보통신대학원 졸업. 전 정우직업전문학교 원장. 현 고려아트컴퓨터학원 원장. 2022년 3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압화
주은

춤을 추던 팔다리 낱장이 된 지 오래
수첩 속 꽃 한 송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
낮과 밤 바뀐 줄 몰라 눌린 아침 앙상하다

창백한 낯빛은 계절 속에 갇히어
누워있는 병상에서 몸이 몸을 접는다
당신을 가로막는 건 당신이라는 칸과 칸

귓속 기억하는 차가운 침대 모서리
외마디 아픈 소리에 모두들 귀를 닫아
누워서 커가는 소리 바스락대는 그 자리

차하

가위바위보
한영권

가위로 자르거나
바위로 치지 말고

따듯이 보자기로 보듬어서 감싸요

내세요!
이기든 지든
아름답게 보를 내요

이달의 심사평

만화방창, 꽃들의 멀미 탓인지 이달에는 응모 편수도 주춤했으며 여전히 시조의 율격을 벗어난 작품들이 눈에 띄어 우려를 금치 못하겠다. 정형률이 생명인 시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긴 논의 끝에 한승남의 ‘바닷길 재단사’를 이달의 장원으로 선했다. 항구 도시 부산의 광복동 거리를 쉽게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시간 습작을 한 듯 구와 구, 장과 장의 조응이 어색하지 않았다. “수평선을 한 땀 떠서 깃 위에 앉혀 놓고” 같은 구절이며 시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셋째 수 종장인 “저녁놀 긴 솔기 따라 저물어간 광복동”은 압권이었다.

차상은 주은의 ‘압화’를 올린다. 압화를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과 비유해서 쓴 발상이 좋았다. 시어의 부림과 각 장의 조응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보다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차하는 단시조인 한영권의 ‘가위바위보’를 올린다. 단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간결한 시형에 여운을 담아야 한다. ‘가위바위보’는 그런 의미에서 단시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최애경·유인상·이인성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히며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손영희, 정혜숙(대표집필)

초대시조

오늘은 또 오늘만큼 되돌아가
정지윤

어둠은 어디에서 태어나 오는 걸까
한순간 지저귀던 새들이 사라진다

저 너머 숨죽인 그림자들
어디론가 빨려가고

숲속의 요양원이 서늘하게 굳어간다
그 많던 기억들을 어디에 심었는지

어두운 시간의 벽에서
곰팡이 피어나고

당신은 누구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오늘은 또 오늘만큼 낯설게 되돌아가

어둠을 수선하느라
밤을 새우는 기억의 숲

◆정지윤

정지윤

정지윤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2015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2014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시조집 『참치캔 의족』, 시집 『나는 뉴스보다 더 편파적이다』, 동시집 『어쩌면 정말 새일지도 몰라요』 .

조선 21대 왕 영조, 미국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영국 67·69대 총리 해럴드 윌슨 그리고 영화배우 윤정희, 숀 코네리, 로빈 윌리엄스. 이들의 공통점은 치매 환자였다는 것이다. 모든 병이 다 그렇듯 치매 또한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 철학자 프타호텝은 치매 노인을 두고 “매일 밤 점점 더 어린이로 변해간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치매 환자는 92만 명(2022년 기준)으로 65세 인구 10명 중 1명이 이 병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이 수치는 그 슬픔을 더 깊게 한다.

시인은 ‘사람은 어디에서 태어나 오는 걸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라 “어둠은 어디에서 태어나 오는 걸까”라는 어떤 의도성을 띤 물음으로 시문을 연다. 이것은 곧 “사라진다” “숲속의 요양원” 등의 시어나 시구에서 그 이유를 찾게 되는데 그건 바로 치매의 비통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머릿속 지우개’라는 이 병의 환자들은 평생을 쌓아왔던 관계나 경력 등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있다. 부모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계절 5월도 막바지다. 그분들 얼굴에 카네이션보다 더 환한 미소가 번져나가기를 기원한다.

시조시인 강현덕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