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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스프링 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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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어린 동은이 강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던 동네 할머니를 구한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동은 역시 삶의 끈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남이 목숨을 버리는 건 방관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동은에게 말한다. “근데 물이 너무 차다. 어후, 춥다. 우리 봄에 들어가자, 봄에.”

 실제로 봄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봄철 자살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1750년대 이후 2010년까지 핀란드와 스웨덴의 260년치 데이터를 연구한 논문에 따르면 5월을 포함한 봄철에 자살률이 느는 현상이 꾸준히 확인됐다. 다국적 연구자들이 한국을 포함한 12개국의 1986~2016년 데이터를 분석해 내놓은 결과에서도 자살률은 봄에 절정을 이루고 겨울에는 줄어드는 패턴이 발견됐다. 한국처럼 기온 변화가 뚜렷한 나라는 계절에 따른 편차도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다.

 이처럼 봄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현상을 ‘스프링 피크’라 부른다.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수치는 온도와 일조량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계절 변화가 자살 충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봄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라 사회적 스트레스를 더욱 많이 유발하는 것도 ‘스프링 피크’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청소년들은 봄꽃도 맘껏 즐기지 못한다. 꽃이 피면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2021년 아동·청소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7명으로 2000년(1.2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2~14세 자살률이 2000년 1.1명에서 2021년 5명으로 훌쩍 뛴 것도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최근 10대 소녀가 극단적 선택 과정을 소셜미디어로 생중계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유명 아이돌이 숨진 채 발견되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나쁜 소식이 들린다.

 ‘더 글로리’에서 동은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곤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또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라며 동은을 되레 걱정한다. 봄에 물에 빠져도 춥긴 매한가지다. 동은이나 할머니처럼 약한 이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회가 되면 봄의 위기도 조금은 수월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